경희궁(慶熙宮)은 종로구 신문로에 자리한 이궁(離宮)으로 서궐(西闕), 새문동(塞門洞)대궐, 새문안대궐, 야주개(夜珠峴)대궐로도 불렀다. 원래는 인조(仁祖, 1595~1649년)의 생부 정원군(定遠君) 이부(1580~1619년)의 개인 주택이었으나,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말을 들은 광해군이 그 기운을 누르려 1616(광해군 8)년 6월에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 광해군 대에 지은 여러 궁궐들이 여럿 헐렸지만, 이곳은 인조의 부친이 살았던 곳이라 헐지 않았다. 또한 이후 많은 임금들이 이곳에 머물며 정사를 보았고,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은 여기서 즉위식을 가졌다.
1760(영조 36)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궁호를 바꾸는데, 이는 ''경덕(敬德)''이 원종의 시호인 ‘공량경덕 인헌정목 장효대왕(恭良敬德 仁憲靖穆 章孝大王)’의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1829(순조 29)년 10월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831 (순조31)년 에 다시 중건하였고, 1859(철종 10)년부터 11년에 걸쳐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이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먼저 없어졌고, 국권 피탈 무렵에는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다. 이 또한 일제에 의해 차례로 철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서 경희궁은 그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 활터로 옮겼고,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기슭의 일본인 사찰 조계사(曹谿寺) 본당으로,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남산 기슭의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일제는 1907년 궁의 서편에 통감부 중학을 세웠고, 1910년 이후 궁이 국유로 편입되자 1915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를 세우고 일본인 관리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광복 후에는 서울중고등학교가 자리 잡았으며, 1980년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자 현대건설이 다시 그 부지를 매입해 사용했다. 이후 서울시가 이를 인수, 1985년에 사적지로 지정하고 1988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을 참고하고 예전의 기단을 이용해 숭정전·자정전, 태녕전 등을 우선 복원했다. ‘경희(慶熙)’는 ‘경사스럽고 화락하다’는 의미이다.
흥화문(興化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고자 궁내의 많은 전각을 헐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에 의해 포살된 침략의 원흉 이또(伊藤) 히로부미(博文)을 위해 일제가 지은 사당(祠堂)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그후 영빈관(迎賓館)이 들어서 흥화문은 그 정문으로 사용 되었다가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금천교(錦川橋)는 흥화문 안쪽의 홍예교(무지개다리)는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상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으로, 광해군 11년(1616년)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묻혔다가 2001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시 나왔던 유구는 복원 시 함께 사용되었다.
숭정전(崇政殿.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은 경희궁(慶熙宮)의 정전(正殿)이다. 경희궁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인 1617년부터 1620년 사이에 지어져서 290년간 조선시대 궁궐의 이궁(離宮)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에 일본인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가 세워지면서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다. 원래 숭정전은 1926년에 조계사(曹溪寺)로 이전되었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안의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法堂)으로 쓰이고 있으나 건물이 낡아서 이전이 어렵게 되었다. 1980년에 경희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1985년부터 다섯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를 토대로 정전인 숭정전을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복원하게 되었다. 건물은 정면5칸, 측면4칸에 기둥이 있는 위쪽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柱心包式)에 팔작지붕으로 대궐의 정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 남쪽에는 숭정문(崇政門), 동쪽에는 여춘문(麗春門), 서쪽에 의추문(宜秋門), 북쪽에는 후전(後殿)인 자정전(資政殿)의 정문인 자정문(資政門)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1985년부터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숭정전을 6년에 걸쳐 복원했다. 경희궁 숭정전은 창경궁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 궁궐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정전(資政殿)은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태령전(泰寧殿)은 발굴 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서암(瑞巖)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80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서암을 새겨두었던 서방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및 위키백과)
* 문화재 소제지: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45 경희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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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