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겐 영원히 좋지 않은 감정의 대상,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하여 축성된 오사카성은
. 오사카(이시야마)혼간지 절의 시대
1496년 정토진종(淨土眞宗)의 렌뇨상인(蓮如上人)은 지금의 오사카성부근에 방사(坊舍)를 지었다. 그후 오사카(이시야마)혼간지(本願寺)라는 큰 사원이 되어 강대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1580년, 천하통일을 목표로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굴복하여 혼간지 절은 주위의 시가지와 함께 불타고 말았다.
. 도요도미 시대의 오사카성
오다 노부나가 사후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3년 혼간지 절터에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 하였다. 천하통일을 이룬 히데요시를 상징하는 커다란 성곽이 완성되었으나 히데요시 사후정권은 도꾸가와(德川)가문이 잡게 되어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오사카성은 낙성,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였다.
.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오사카성의 재축
오사카성은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명령에 의해 1620년부터 10년에 걸쳐 전면적으로 재축되었다. 천수각은 1665년에 낙뢰 때문에 소실하고 말았으나 오사카성은 에도시대(江戶時代)를 통해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서일본지배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막부가 멸망해서 내전이 시작된 1868년에는 많은 건조물이 소실하였다.
. 근대의 오사카성 천수각 부흥
근대의 오사카성은 군사시설로서 사용되었다. 1931년 오사카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현재의 천수각이 부흥괴어 박물관시설로서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오사카성 일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 때문에 큰 손해를 입었으나 전후는 사적공원으로 정비되었다.
오사카성의 '바깥(외부)해자' 일본어로는 '호리(堀)'라고 부르는 성의 견고한 방어 진지로 해자의 폭이 좁게는 70m에서 넓은 곳은 90m나 되고 100만 여개 가까이 사용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성벽은 길이가 12Km에 달하는 내외 두 겹의 수성을 지나면 성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사쿠라몬'을 지나면 '천수각'을 만나자 마자 보게 되는 '다코이시'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돌은 오사카성의 경내에서 가장 큰 바위로 평균두께 90Cm, 무게는 130톤이다. '해자'와 함께 유심히 봐 둬야 할 것이 바로 '이시가키'라고 부르는 돌담으로 막부시대를 이끈 '도쿠가와' 가문이 각 지방의 영주(다이묘)들에게 비용을 분담시켜 쌓은 석축으로 이렇게 큰 돌을 먼 지방에서부터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운반해 왔다니 기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천수각 우리와는 감정이 좋지 않은 박물관 전시된 층을 지나 8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경치, 오사카성 공원(오사카조코엔)과 오사카 시내의 고층건물들이 그림같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