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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화성 융릉

들풀/이영일 2013. 8. 3. 09:45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 사적 제206호) 중에 화성 융릉(華城 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무덤이다. 1789년(정조 13)에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 부르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광무 3)에 장종으로 추존되어 융릉으로 높였고 제향일은 매년 4월 둘째 일요일(양력)이다.

 

화성 융릉(華城 隆陵)은 합장릉으로 병풍석을 세우고 봉분의 인석 위에는 만개하지 않은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한껏 피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는 듯한 모습으로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 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고 참도도 매우 넓으며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화려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융릉에는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으며 이 연못은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坤申方, 남서방향은 융릉의 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 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종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장조(장조 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生父)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광무 3)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한중록』을 남겼다.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왕릉 분포는 조선왕족의 무덤은 모두 122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4기, 묘가 66기다. 조선왕실의 무덤은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원(園)’, 그 외 왕족인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로 구분되어 불렸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빈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가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조선왕릉의 구성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능침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진입공간)이 만나는 곳(제향공간)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정자각에서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평소에는 산 자의 출입이 금지되는 성의 세계인 성역 능침공간, 홍살문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까지의 제향공간, 왕릉의 관리와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왕릉입구인 홍살문에 이르는 진입공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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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널로그: http://blog.donga.com/yil2078/

 

이영일/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