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암(自在庵, 동두천시 향토유적 제8호)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逍遙山)에 있으며 654년(무열왕 1)원효(元曉, 617-686))가 창건 하였으며, 974년(광종 25)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153년(의종 7)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폐사와 다름없이 명맥만 이어 오다가, 1872년(고종 9)원공(元空)과 제암(濟庵)이 중창하여 영원사(靈源寺)라고 하였다. 그때의 당우로는 영산전(靈山殿)ㆍ만월보전(滿月寶殿)ㆍ독성각(獨聖閣)ㆍ산신각(山神閣)ㆍ별원(別院)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화재로 인하여 만월보전(滿月寶殿)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소실되자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이 절을 중창하고 다시 자재암이라 하였다. 이때에는 전각(殿閣)뿐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ㆍ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이 절의 유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원효ㆍ의상(義湘)ㆍ윤필(尹弼) 등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봉안하였다. 6ㆍ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으나, 1961년 진정(眞靜)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 법조(法照)가 삼성각(三聖閣)을 각각 지어 현재의 당우를 완성하였다.
자재암에는 여러 전설적 설화가 전한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이곳에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고 하였다. 요석궁은 원효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를 가졌던 곳이며, 나중에 원효가 이곳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 한다. 자재암이라는 사명(寺名)을 갖게 된 것은, 원효가 요석공주와 관계를 가진 뒤 관음보살이 변신한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을 설법을 통해서 물리친 후, 다음날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을 상징하며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반야바라밀다 심경약소 언해본(조선세조 10년)이 완벽하게 발견되어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절 근처에는 조선 태조가 즐겨 찾았던 백운대(白雲臺)와 폐정(廢井)이 있고, 백운대 밑에 있는 폭포는 원효가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원효대(元曉臺)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소요사(逍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제암과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서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해지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원효(元曉, 617-686)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 두차례(34세, 650년 및 45세, 661년)나 시도하였으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왕성한 저술, 선교활동을 펴, 그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에 대한 명성이 항간에 자자하였다. 그는 광대들이나 쓰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배, 몽매하고 늙은 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 마시고 거문고를 켜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코흘리개 아이까지도 부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요석공주(瑤石公主)는 김춘추의 둘째누이로 첫 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는데 불심이 깊었던 공주는 인격이 고매하고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667년 문무왕 7년경(51세) 부왕인 태종무열왕의 과부공주인 요석과 만나 얼마 후 설총을 낳고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라 하며 무애의 보살행을 행하였다 한다.
결혼 전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를 귀부인을 얻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원효의 결혼에의 관심으로 보는 견해도 많지만 새 시대의 지평을 열어보이리라는 사상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소요산에 가면 원효가 과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높은 산 불끈 솟은 바위는 지혜로운 이가 들 곳이요,(원효대)/ 푸른 소나무 깊은 골은 수행자가 깃들 곳이니라.(자재암)"/ "주리면 나무열매를 먹어서 주린 창자를 달랠 것이요,(소요산)/ 목이 타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힐 것이니라.(원효폭포)"/ "메아리가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하는 법당으로 삼고,(나한전-굴)/ 슬피우는 기러기를 기쁘게 마음의 벗으로 삼을 것이니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보물 제1211호)은 당나라 현장(玄장)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해 법장(法藏)이 해설을 단 주석서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줄여서 ‘반야심경’이라고도 부르는데, 여러 종파에서 공통적으로 읽고 외우는 보편적인 경전이다.
이 책은『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仲希)가 자신이 지은『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것으로,『반야심경소현정기』라 부르기도 한다. 목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세로 31㎝, 가로 19.1㎝의 크기이다.
책머리에는 금강경의 전문(箋文: 글의 뜻을 해명하거나 자기의 의견 등을 적어서 그 책에 붙이는 작은 쪽지)인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다. 전문에 의하면 금강경은 조선 세조 10년(1464) 간경도감<刊經都監: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 끝에는 조선 세조 10년(1464)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이 왕명을 받아 간경도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보물 제771호)와 같은 책이나 책 첫머리에 금강경의 전문이 붙어 있는 것이 다르다. 또한 보존 상태도 보다 양호하며, 교정을 하였다는 뜻으로 ‘교정인(校正印)’이라 쓰여진 도장이 찍혀 있는 점도 다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기 동두천시 평화로 2910번길 406-65, 자재암 (상봉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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