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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도호부청사와 그 주변의 문화재들

들풀/이영일 2015. 5. 12. 09:02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는 관아건물 중 하나로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던 숙박시설인 객사,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등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총 23동 238칸의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1909년 부평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은 헐어버리고, 현재 건물만 교정 모퉁이로 이축하였다. 원래 남은 건물은 ‘ㄱ’자형이었으나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ㅡ’자형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건물은 예전 형태로 보아 동헌(東軒)이나 현감(縣監)의 살림채였던 내아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6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부평도호부 청사는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에 부평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청사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청사규모로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욕은지(浴恩池,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는 인천시 계양구 부평초등학교에 자리한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앞쪽에 있는 어사대(御射臺)와 함께 있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조선 고종 24년(1887)에 새로이 고쳐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긴 돌을 이용해 단을 쌓고 네모 형태로 만들어 조선시대 연못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 18m, 세로 16m의 크기로 가운데에 둘레 7m의 돌산을 만들어 풀과 나무를 심고, 다리를 만들어 남쪽과 연결하였다. 연못 동쪽에 쌓여진 돌 가운데에는, 고종 24년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을 새긴 돌이 끼어 있다. 정조 21년(1797) 왕은 김포 장릉(金浦 章陵)을 참배하고, 부평(富平)을 경유하여 생부를 모신 수원 현륭원에 갔다고 전해진다. 이 때 부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 곳에서 활을 쏘고 손을 씻은 것으로 여겨진다.

 어사대(御射臺,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는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앞쪽에 욕은지(浴恩池)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조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융릉(隆陵)에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잠시 들러 휴식하던 곳으로 정조는 활쏘기를 즐겨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였다는데, 어사대에서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예전에 동쪽방향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고종 24년(1887)에 증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계산동은행나무(桂山洞銀杏나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는 부평초등학교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로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5m, 둘레 10m에 달하는 노목이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사찰이나 향교의 뜰에 많이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행(銀杏)’이란 이름은 열매가 겉으로 보기에는 살구같이 생겼으나 과육을 제거하면 은백색의 종자가 나온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나무는 본래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풍치목(風致木)으로 심었다고 한다. 부평초 교정에는 또 다른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수령 600년, 수고 20m, 나무둘레 6m로 1882년 9월 29일 인천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자라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인천 계양구 어사대로 20 (계산동, 부평초등학교 교정)

* donga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2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