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 보물 제141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文廟)는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동·서무(東·西廡) 등 제향 공간구역과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재(東·西齋) 등 교육 공간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방 향교(鄕校)를 포함한 문묘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울 문묘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試讀)으로,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 장소(科場)로 사용되었다. 총 18칸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하여 지었다. 가운데 마루로 된 중당과 그 양옆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 날개채(翼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은 성균관(成均館)이라 알려져 있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명륜당의 내부 현판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子)한 것이며, 정면 외벽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동재와 서재(東·西齋)는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20칸 길게 배치되어 있는 학생들의 기숙사 공간으로 건물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존경각(尊經閣)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嚆矢)로 성종 6년(1475)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명륜당 북쪽에 건립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보관했다.
육일각(六一閣)은 영조 19년(1743) 향관청 서쪽에 건립했으나 지금은 명륜당 동북쪽으로 이건 하였다.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의 기본 소양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례(六藝)로 문무(文武)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록청(正錄廳)은 태조 7년(1398) 명륜당 동쪽에 남향8칸으로 지어졌다.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성균관 관원들의 사무실이다.
향관청(香官廳)은 재관들이 재계(齋戒)하고 향(香)과 축문(祝文)을 보관하던 곳으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년(1473) 명륜당 동북쪽에 남향10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명륜당 은행나무(明倫堂 銀杏-)는 1519년(중종 14)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杏亶)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진사식당(進士食堂)은 동·서재에 기숙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식당이다. 태조 7년(1398) 명륜당 동쪽 남향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서울 文廟와 成均館, 사적 제143호)의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하며,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조선시대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이다.
비천당(丕闡堂)은 성균관의 별당으로 대사성(大司成) 민정중(閔鼎重)이 진언하여 헌종 5년(1664)에 지어졌다.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제2시험장소(第二科場)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明倫堂)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비천당(丕闡堂)은 주자(朱子)가 성인(聖人)을 찬(贊)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 큰 계책을 크게 밝혀) 억사흥정(抑邪興正: 사악함을 억누르고 정의를 지킨다.)’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1988년 8월 건평 184.4㎡의 규모로 다시 복원하였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서울 문묘 일원의 보물 및 현대건축물을 제외한 지상시설물 포함하여 2011년 7월 28일 사적으로 지정 하였다.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 - 朱子 -
부모와 자녀는 친함이 있도록 하며(父子有親), 정부와 국민은 의리가 있도록 하며(君臣有義),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도록 하며(夫婦有別), 어른과 젊은이는 차례가 있도록 하며(長幼有序), 벗 사이에는 있어야한다(朋友有信).
널리 배우고(博學之), 자세히 묻고(審問之), 신중히 생각하고(愼思之), 밝게 변별하며(明辨之), 힘써 행하라(篤行之).
말은 참되고 미덥게 하고(言忠信), 행동은 도탑고 공손하게(行篤敬), 성냄을 다스리고 욕심을 누르며(懲忿窒欲), 잘못을 바로잡아 착함으로 나아가라(遷善改過).
의리를 바로잡을 뿐(正其義 不謀其利), 이득을 도모하지 않고, 도리를 밝힐 뿐, 공적을 꾀하지 마라(明其道 不計其功).
자신이 싫은 바를 남에게 하지 말고(己所不欲 勿施於人), 행하고도 얻음이 없거든 자신을 되돌아보라(行有不得 反求諸己).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은 숭양서원(崇陽書院), 악록서원(岳麓書院), 응천서원(應天書院)과 함께 중국 4대서원의 하나이다. 940년 唐나라시대에 이발(李渤)이 그 형 이섭(李涉)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며 독서를 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백록(白鹿)을 길렀다. 그런데 이 사슴이 십 리 밖의 마을에서 주인이 필요로 하는 서적과 문방사우를 구해 돌아올 정도로 영민하였기에 이발(李渤)을 백록선생(白鹿先生), 거처를 백록동(白鹿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대10국 시대 서원의 전신인 여산국학(廬山國學)이 설립되고, 宋代에 地方子弟들을 교육하는 서원이 되었다. 그리고 남송(南宋)시기에 이르러 주희(朱熹)가 부흥시켰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백록동서원을 본떠 만든 것인데 조선 중종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을 제사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세운 서원이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李滉 退溪) 요청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았다. (자료출처: 문화재청과 성균관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25-2 (명륜3가)
* donga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