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지모(북한산성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27일(수) 13시부터 ‘숙종의 길 걷기대회’ 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300여년 전 북한산성을 축성한 다음 해인 1712년 숙종이 성내를 처음 행차한 날을 기념하여 북지모 회원과 북한산성에 관심 있는 일반 참가자 20여명이 당시에 숙종이 걸었던 대서문-하창지-중성문-산영루-북한산중흥사지-행궁지-북한산성입구 코스를 경기도문화재단 박현욱 연구사의 문화해설과 함께하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중흥사지의 중흥사(벽암지홍 스님)에 들려 산사에서 제공하는 차를 마시며 주지스님으로부터도 산성과 스님들의 역할도 듣는 기회를 가졌다. 북한산성의 역사적 의의와 축성기술을 알고 선조들의 뜻과 문화유산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북지모에서는 매월 1회씩 우리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행사를 진행하면서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가치를 일깨우는 기회를 갖고 있다.
북한산성(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 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북구,도봉구일원)은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북한산중흥사지(北漢山重興寺址, 경기도 기념물 제136호,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259번지)는 북한산성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있는 옛 절터이다.
중흥사는 고려 전기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말기에 고승 보우가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북한지』에 의하면 이 절은 본래 30칸 정도의 작은 규모에 불과했으나 숙종 39년(1713) 외적에 대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고서 숙종 41년(1715)년에 늘려 지어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8도의 절에 명을 내려 1년에 6차례 번갈아 의승을 뽑아서 산성내의 절에 주둔시켰다.
승군들이 주둔하였던 용암사, 노적사, 경흥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중흥사을 관리하였던 중요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여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있다.
북한산성 행궁지(北漢山城 行宮址, 사적 제479호, 덕양구 북한동 169번지)는 도성 외곽의 전략적인 요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한 행궁으로서 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한 임시궁궐이며, 도성 방어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다른 행궁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후기 집권층의 국가의식과 애민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현재는 행궁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지만 1999년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행궁지의 과거 모습을 알 수 있는 유구들이 노출되고 지하에도 유구가 매장되어 있는 중요 유적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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