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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과 풍자 그리고 자비의 전설을 간직한 전등사(江華 傳燈寺)

들풀/이영일 2015. 6. 14. 14:29

   강화 전등사(江華 傳燈寺)는 단군신화(檀君神話)를 연원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온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사찰이다. 우리 민족에게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세웠다고 전하지는 강화도에서 1600여 년을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이름은 서기 1282년 진종사(眞宗寺)에서 개명되었는데, 고려 제25대 충열왕(忠烈王)의 비(妃)인 정화공주(貞和宮主)가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인간(印刊). 봉안(奉安) 하도록 한 것과 옥(玉)으로 만든 등을 절에 시주(施主)한 것이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전등(傳燈)이란 ‘불법(佛法)의 등을 전한다’, 즉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로서 전등사는 '불법을 전하는 사찰‘ 이란 뜻이다. 전등사는 고려시대 대몽항쟁(大夢抗爭)의 근본도량이었으며 격동하는 근대사의 중심에서 국운을 지켜내는 사찰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도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염원을 품은 채 대웅전과 약사전 내부에 남아 있는 무수한 병사들의 이름과 동문 앞에 있는 양헌수(梁憲洙) 장군(將軍)의 승전비(勝戰碑)는 전등사가 민족과 영욕을 함께하는 천년고찰이라는 사실은 증명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을 만들고 지켜낸 전등사는 고려시대 부처님의 힘으로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16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판각(板刻)하고,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세계 최대의 단일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해온 기록문화유산의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격동의 역사 속에서 지켜낸 정족산사고본(鼎足山史庫本, 1181책)만이 유일하게 전책으로 남아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정족산사고에서는 실록과 더불어 왕실 문서를 보관하였는데, 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이 ‘장사각(藏史閣)’이고 선원세보(璿源世譜)를 비롯한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보각(璿源譜閣)’이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전등사를 방문해 직접 쓴 ‘취향당(翠香堂)’ 편액을 내렸고,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대조루(對潮樓) 등 중수(重修) 불사가 이뤄졌다.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 주지스님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僧職)인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1866년 프랑스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을 때 전등사 스님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서책을 토굴로 옮겨 지켜낸 것은 전등사가 역사의 책무를 다한 사찰이었다.

   익살과 풍자 그리고 자비의 전설을 간직한 전등사 대표적인 건물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건축물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都邊首)가 불사를 하던 중 마을의 주모와 깊은 사랑에 빠져 불사를 마치면 주모와 혼인할 생각으로 정성껏 모아둔 돈을 모두 맡겼는데, 공사 막바지 어느 날, 주막으로 찾아가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라진 여인 생각에 도편수는 몇 날을 힘겨워 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했다. 공사가 끝날 무렵 대웅전 처마 네 군데에 떠받치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만들었다.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과연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을까? 욕심에 눈이 멀어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징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이 대웅전에서 들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도편수의 불교적 사랑과 염원이 반영된 것이란다. 어떤 사람들은 나부상이 아니라 사찰을 수호하는 원숭이로 간주하기도 한다. 나부상이든 원숭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성불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호국신화(護國神話)의 정기가 어린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천년고찰 전등사에 들어서려면 삼랑성 성문을 지나야 한다. 성문을 지나는 순간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수가 쌓아서 이름이 지어진 삼랑성(三郞城)! 고대 토성으로 시작한 이곳에 민초들이 거칠고 둔탁한 할석(割石)을 정성스레 다듬고 호국의 염원을 담아 쌓아 오늘에 으르고 있다. 삼랑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한 성으로 길이가 2,3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성문이 있다.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민족자존의 역사 그 자체이다.

   전등사의 문화재는 강화 전등사 대웅전(江華 傳燈寺 大雄殿, 보물 제178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江華 傳燈寺 藥師殿, 보물 제179호), 전등사 철종(傳燈寺 鐵鍾, 보물 제393호),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江華 傳燈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785호),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江華 傳燈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보물 제1786호), 강화 삼랑성(강화 三郞城, 사적 제130호), 전등사 약사전후불탱(傳燈寺 藥師殿後佛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4호), 전등사약사전석불좌상(傳燈寺 藥師殿石佛座像,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 전등사 약사전현왕탱(傳燈寺藥師殿現王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 전등사법화경판(傳燈寺法華經板,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 전등사청동수조(傳燈寺靑銅水槽,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전등사업경대(傳燈寺業鏡臺,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전등사 대웅보전후불탱(傳燈寺 大雄寶殿後佛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전등사 수미단(傳燈寺須彌壇,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전등사 강설당아미타불탱(傳燈寺 講說堂阿彌陀佛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정족산가궐지(鼎足山假闕址, 인천향토유적 제11호), 선원보각지(璿源譜閣址, 인천 향토유적 제12호) 등 수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전등사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온수리)

* donga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