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사적 제130호)은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 산성으로,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호국신화(護國神話)의 정기가 어린 천년고찰 전등사에 들어서려면 삼랑성 성문을 지나야 한다. 성문을 지나는 순간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수가 쌓아서 이름이 지어진 삼랑성(三郞城)! 고대 토성으로 시작한 이곳에 민초들이 거칠고 둔탁한 할석(割石)을 정성스레 다듬고 호국의 염원을 담아 쌓아 오늘에 으르고 있다. 삼랑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한 성으로 길이가 2,300m 정도이며,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성문이 있다.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민족자존의 역사 그 자체이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삼랑성(三郞城)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宗海樓)’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摩尼山)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선원보각지(璿源譜閣址, 강화향토유적 제12호)는 1660년(현종 1) 강화유수 유념이 건립하였는데, 규모는 1랑이며 정족산성 안 장사각(藏史閣) 북쪽 편에 있다.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는 1679년(숙종 5) 낭원군(朗原君) 이간이 ≪ 선원계보기략 璿源系譜記略≫을 올려 처음 간행하였고 그 뒤로 임금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중교, 보간하여 왔으며 1897년(고종 34)에 모두 모아 합간 하였다.
선원보각 건물은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파괴하였으나 1998년 강화군에서 장사각과 함께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전등사는 세계문화유산을 만들고 지켜낸 사찰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16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판각(板刻)하고,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세계 최대의 단일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해온 기록문화유산의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격동의 역사 속에서 지켜낸 정족산사고본(鼎足山史庫本, 1181책)만이 유일하게 전책으로 남아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정족산사고에서는 실록과 더불어 왕실 문서를 보관하였는데, 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이 ‘장사각(藏史閣)’이고 선원세보(璿源世譜)를 비롯한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보각(璿源譜閣)’이다. 1866년 프랑스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을 때 전등사 스님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서책을 토굴로 옮겨 지켜낸 것은 전등사가 역사의 책무를 다한 사찰이었다.
정족산 가궐지(鼎足山 假闕址, 인천향토유적 제11호)는 전등사 서문 등산로를 따라 150m 가량 올라가면 나온다. 고려 고종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현(白勝賢)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假闕) 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郎將)으로 있을 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 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했을 때 가궐을 짓고 강화 마니산 참성단(江華 塹星壇, 사적 제136호)에 제사를 하면 친조문제가 해결되고 주의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전한다. 당시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일제 때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으나 1999년 강화군에서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는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를 한 양헌수 장군(梁憲洙 將軍, 1816∼1888)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양헌수 장군(梁憲洙 將軍)은 1838년(헌종 4)에 무과에 급제한 이래,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중군을 거쳐 어영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저서(著書)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승전비(勝戰碑)는 조선조 고종 10년(1873)에 세운 것으로, 화강암의 긴 직사각형으로, 윗변을 둥글게 다듬었고,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陰刻)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병인양요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巡撫千總 梁憲洙 將軍)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으로 프랑스군 160명과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6명이 사살되고 60∼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프랑스군은 다음날인 11월 10일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양헌수의 군대는 전사 1명, 부상 4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은 장군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다.
전등사(傳燈寺)는 고려시대 대몽항쟁(大夢抗爭)의 근본도량이었고 격동하는 근대사의 중심에서 국운을 지켜내는 사찰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고 지금도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염원을 품은 채 대웅전과 약사전 내부에 남아 있는 무수한 병사들의 이름과 동문 앞에 있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는 전등사가 민족과 영욕을 함께하는 천년고찰이라는 사실은 증명하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전등사, 두산백과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 온수리 산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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