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昌德宮 樂善齋. 보물 제1764호)는 헌종이 1847-1848년 지은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은 본채와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등 총 9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며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 후원에는 헌종이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을 위해 지은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따려 있다.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현재는 상량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음)와 석복헌(錫福軒) 뒤에는 한정당(閒靜堂)이 수강재(壽康齋) 뒤에는 취운정(翠雲亭)이 건물과 후원사이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 괴석, 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위치한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기품 있는 대표적인 정원이다. 특히 낙선재 후원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하게도 만월문(滿月門)을 만들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안에 사대부주택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뿐이다.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 13년(1847)에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 헌종의 후궁) 김씨를 맞이하여 지은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서재 겸 사랑채로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였고 그 후 근대에는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1901∼1989) 여사가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1912∼1989)가 1960년대 일본에서 귀국하여 숨을 거둔 1989년까지 이곳 낙선재에서 머물렀다.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순종의 비 순정효황우가 1966년까지 기거한 석복헌과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집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낙선재는 남행각에 나있는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자리 잡고 그 좌측에 서행각이 남행각과 직교로 연접해 있다. 맨 좌측에 앞으로 돌출한 주형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가 되면서 시선을 끈다. 누마루, 온돌방, 대청, 다락방을 배열하였으며, 다락방 배면에도 흔치 않은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고, 건물 뒤에는 쪽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 공간 간 이동이 편리하다. 이 건물에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다양한 문양의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은 단연 돋보이는 백미로 누마루 공간의 위계를 읽게 한다.
헌종은 그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평가대로 낯에는 물론 깊은 밤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옛 분들의 서첩을 매우 사랑하여 낙선재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가득하였다. 헌종의 소장 도서목록인 ‘승화루서목’에는 4,555점이 기록되어있는데 그 가운데 서화가 918점이나 되었다. 서화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을 말해 주듯 낙선재 현판을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의 글씨이고,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翁樹崑)의 글씨다. 이들은 모두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던 청나라 대가들이다.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주택형식으로 건축되었으나, 궁궐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된다.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 창덕궁(사적 제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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