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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과 원림문화.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명승 제40호)

들풀/이영일 2015. 7. 6. 11:05

   선비정신과 원림문화.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명승 제40호)은 조선 중기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켜 조성한 대표적인 민간 별서정원이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1519)로 능주로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당시 사대부의 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양산보의 마음을 잘 표현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정원을 1519년 이후부터 소쇄원(瀟灑園)을 조성되기 시작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순, 김인후 등의 도움을 받고 그의 아들 자징(子澂)과 손자인 천운(天運) 등의 3대에 걸쳐 완성되면서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은 크게 담장 안의 내원(內園)과 담장 밖의 외원(外園)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말하는 소쇄원 내원을 말한다. 송(宋)의 명필 황정견(黃庭堅)이 주무숙(周茂叔)의 사람됨을<광풍제월(光風霽月)>에 비유된 것으로 유래하여 소쇄원의 대표적 건물을 각각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으로 지었다.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 이라는 뜻의 제월당은 주인이 거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는 공간이며,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 이라는 뜻의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소쇄원 입구에 위치한 초정(草亭)과 대봉대(待鳳臺)는 양산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애양단(愛陽壇) 담장에는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사십팔영이 걸려 있었다. 매대(梅臺)에는 2단의 단을 두고 매화를 심었으며, 문패격인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소쇄원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 보이며, 이후 송강 정철은 ‘자신이 태어난 해(1536년)에 소쇄원이 조영 되었다’라는 시를 남겼다. 이후 하서 김인후는 1548년<소쇄원사십팔영>을 지어 애양단의 담장에 걸었으며, 제봉 고경명은 1574년 유서석록(遊瑞石綠)에서 소쇄원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1755년 소쇄원을 그린 목판인 <소쇄원도>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제월당 내부는 소쇄원사십팔영과 소쇄원을 주제로 한 한시들이 걸려 있다. 제월당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전한다.

   소쇄원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 환벽당과 함께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할을 하였다.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볼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 등 (지곡리)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4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