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 보물 제1220호)는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되었을 때 쓴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漢詩)이다. 대북파(大北派)의 위세에 시달리던 자신을 늙은 소에 비유하고, 광해군(光海君)을 그 늙은 소에 채찍을 가하는 주인에 비유했다. 왼쪽 하단에 숙종(肅宗)이 남긴 발문이 있다.
“老牛用力 已多年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여러해/ 領破皮穿 只愛眠 목 부러지고 가죽 헐었어도 잠만 잘 수 있다면 좋겠다./ 犁耙已休 春雨足 쟁기질, 써레질 이미 끝나고 봄비도 충분한데/ 主人何苦 又加鞭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게도 또 채찍을 가하네”
칠언절구(七言絶句)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御筆)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仁穆王后 七言詩)’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인목황후(仁穆王后)의 본관은 연안(延安).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仁穆王后筆跡) 첩(帖)이 남아 있다.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목릉(穆陵)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오죽헌시립박물관 (죽헌동)
*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의 목릉: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3458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4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