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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시련의 현장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사적 제225호)

들풀/이영일 2015. 8. 10. 06:07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사적 제225호)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要塞)이다.

안산(安山)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草芝梁營)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鎭)’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雲楊號)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현재 전시된 대포만 있었다. 당시의 진품이다.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 사정거리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 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구경 100m/m, 길이 215cm, 중량 1.800kg이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진지성벽(陣地城壁)과 노송(老松)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砲痕)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를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草芝墩)을 복원하였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5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