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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관아와 강릉 임영관 삼문

들풀/이영일 2015. 8. 24. 20:23

  강릉 임영관 삼문(江陵 臨瀛館 三門, 국보 제51호)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대도호부 관아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삼문만 남아 있었다. 이 객사를 임영관(臨瀛館)이라 하였다.

삼문은 화강석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전면과 배면 열에 배흘림 원기둥(圓柱)을 세우고 가운데 열에는 각기둥을 세워 문을 단 구조다. 앞면3칸, 옆면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江陵 大都護府 官衙, 사적 제388호)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臨瀛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란 고려시대에 들어와 행정조직이 개편 되면서 관아시설도 체계화되었다. 유교가 통치 이념인 조선시대에는 사신의 접대공간뿐 아니라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의 구조는 임영관(臨瀛館) 삼문을 들어서면 첫 대문인 중대청(中大廳)은 정면3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이며 고려건축 양식의 건물로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관찰사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 된다. 중대청 뒤로 전대청(殿大廳)은 객사(客舍)의 정청(正廳)이자 임영관의 중심공간으로 건물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9칸에 이어 지붕이 한 단계 낮게 지어진 좌.우의 동대청(東大廳)과 서헌(西軒) 익사(翼舍)를 두고 있다. 전대청에 왕의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특별한날 의례(儀禮)를 행하던 장소였고 서헌(西軒)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었으며 정3품 관료가 숙식하던 장소였으며 동대청은 정면4칸, 측면3칸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었으며 서헌보다 위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전대청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臨瀛館)’이란 현판(1366년 객사문 도리위에 옮겨 걸었다가 2006년10월 임영관 복원 준공 시 전대청으로 옮겨 달음)은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친필 글씨를 피나무로 만든 4개의 판위에 양각(陽刻)으로 새겼다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의 ‘강릉 임영관 삼문’만 남아 있다가 2006년 복원하면서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강릉임영관’으로 부르다가 2014.11.27 고시에 의거 ‘강릉 대도호부’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강원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