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도지사 안희정)는 국내 여행사 관계자, 풍경이 있는 여행(대표 한지환) 등 12명을 초청해 지난 9일(수)부터 10일(목)까지 1박 2일간 충청남도의 새로운 관광 여행상품 개발을 위한 팸투어를 진행했다. 이번 팸투어는 서산 해미읍성, 백제역사문화단지, 부소산성 황토돛배체험, 보령 대천항수산시장, 보령시 삽시도 답사, 대천짚트랙 레저스포츠 체험을 충남의 관광인프라와 관광 홍보 및 관광상품을 개발하고자 현지답사와 체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사적 제116호)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미(海美: 바다가 아름답다)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성내면적 203,592㎡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성곽길이 1,800m을 축조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잠양루:岑陽樓)·서(지성루:枳城樓)·남(진남문:鎭南門)·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다. 해자(垓字)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려 파서 만든 것으로 과거에는 읍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현재 읍성 북쪽에 석축 해자를 복원하였다. 각자석(刻字石)은 성 외벽의 성돌에 공주, 청주, 임천 등 각 고을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을별로 일정 구간의 성벽을 나누어 쌓으면서 그 구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 부실공사를 막는 공사 책임제의 증거다.
진남문(鎭南門)은 읍성의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으로 아치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이다. 500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성 안쪽에서 보면 문루 아래를 가로지르는 받침돌 중앙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凰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면홍치(凰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성종 22)에 중수(重修)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관찰사 수령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등이 여기에서 행해졌다. 내아(內衙)는 동헌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관과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던 생활 처소이다. 객사(客舍)는 객관이라고도 하며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 조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방관리들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옥사(獄舍)는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 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海美 殉敎者 略史)’를 토대로 복원, 재현하였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 곳에서 투옥하였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瑞山 海美邑城 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는 일명 호야나무(충청도사투리)라고 불리며 수령 300년 이상 추정되는 나무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사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1866년 병인박해(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 때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나무에 철사 줄로 매달고 고문을 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그 수가 무려 1.000여 명 이상 이었다고 전한다.
청허정(淸虛亭)은 1491년(성종 22)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都使) 조숙기(曺淑沂)가 건립했다. ‘맑고 욕심없이 다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활을 쏘며 무예를 익혔고, 문객들은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해미읍성 민속가옥으로 조선시대 민가로 부농의 집, 상인의 집, 말단관리인 서리의 집을 재현 복원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1576년(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권관과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 번째 관직으로 1579년(선조12년) 충청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 남을 따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상관인 주장에게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극진히 말하여 이를 바로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 고 전한다.
이 읍성에는 동헌(東軒)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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