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도지사 안희정)는 국내 여행사 관계자, 풍경이 있는 여행(대표 한지환) 등 12명을 초청해 지난 9일(수)부터 10일(목)까지 1박 2일간 충청남도의 새로운 관광 여행상품 개발을 위한 팸투어를 진행했다. 이번 팸투어는 서산 해미읍성, 백제역사문화단지, 부소산성 황토돛배체험, 보령 대천항수산시장, 보령시 삽시도 답사, 대천짚트랙 레저스포츠 체험을 충남의 관광인프라와 관광 홍보 및 관광상품을 개발하고자 현지답사와 체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사적 제5호)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영일루(迎日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조룡대(釣龍臺)는 낙화암(落花岩)아래 바로 앞쪽의 작은 섬 모양의 바위이다. 옛날 당(唐)나라 군사가 백제의 왕성을 공격하기 위해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수소문하여 그 연유를 알아내고는, 수중암에 걸터앉아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강물 속에서 백제 무왕(武王:선왕)의 화신인 청룡을 낚아 올림으로써 용의 조화를 막고 풍랑을 멎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백화정(百花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은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의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낙화암(落花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은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부여 구드래 일원(扶餘 구드래 一圓, 명승 제63호)의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 고란약수)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경관이 비길데 없이 아름답다.
고란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은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부여 고란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보살좌상(夫餘 皐蘭寺 木彫阿彌陀如來坐像 및 菩薩坐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8호)은 극락보전 법당의 삼존불상이다. 그 중 두 구는 같은 형식을 보이지만 부처님의 왼쪽에 봉안된 관음보살상은 근래 다시 만들어 모신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즉 삼존불이 같은 시기, 같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앙에 봉안된 아미타여래좌상과 그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상은 크기나 기법, 특징에서 처음부터 같이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병과 같은 대세지보살상의 특징이나 지물이 없어 현재와 같은 봉안 위치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즉 대세지보살상의 손의 위치가 반대인 점에서 볼 때는 부처 왼쪽의 관음보살상 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번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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