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은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客舍)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궐패(闕牌)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 그후 조선 선조 26년(1603) 중창하였고 고종 21년(1884) 목사 박규동이 삼창하였으며, 1963년 9월에 중수, 1976년 9월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객사는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겹처마집으로, 외일출목(外一出目)의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望華樓)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 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羅州郡廳舍)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東翼軒, 碧梧軒)∙서익헌(西翼軒)을 복원(2004∼2008)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出兵式)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8 (과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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