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羅州邑城, 사적 제337호)은 고려시대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석성(石城)은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원래 길이는 약 3.53km, 높이 약 2.7m로 평지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 형태로 쌓았으며, 대포를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다고 한다. 성문(城門)은 동·서·남·북에 4대문(東漸門, 西城門, 南顧門, 北望門)이 대한제국 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왔으나 1916년에서 1920년 사이에 일제가 성벽에 대한 훼손하여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북문터(北門址)에 기초석(基礎石)만 남아있었다.
동점문(東漸門)은 2006년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문루(門樓)와 옹성(甕城)으로 복원되었다. ‘나주천 물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서경 하서 우공편(書經 夏書 禹貢篇)’에서 유래되어 나주 사람의 정신이 작게는 개울에서 시작하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성문(西城門)은 문루(門樓)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甕城) 21.94m 등을 2011년 복원하였다. 문헌에 주로 ‘서성문(西城門)’ 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나지만 1815년에 편찬된 것으로 전하는「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與地勝覽)」에 “동남북 삼문(三門)에는 편액(扁額)이 없으며, 서문에만 ‘영금문(映錦門)’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기록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에서 편액을 걸었다.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서성벽을 넘지 못하고 전멸하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으며,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 전봉준이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중렬과 협상을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고문(南顧門)은 1993년 남문터에 복원 하였다. 2층으로 된 누(樓)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나주읍성의 옛 모습 일부분을 보여준다. 남문터(南門址)의 석축은 비록 적게 남아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 동∙서∙남문은 복원 하였고 북망문은 복원 중에 있다. 주변에 문화재로는 나주향교와 금성관이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전남 나주시 남내동 2-20번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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