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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객사.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국보 제304호)

들풀/이영일 2015. 11. 17. 18:17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국보 제304호)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객사(客舍)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鎭南館) 건물은 높은 언덕 위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둘레 2.4m의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평면 전체가 통칸으로 뚫려 있고 벽체도 없으며 창호도 달지 않았다. 정면 15칸, 측면 5칸, 건평 240평(약 780㎡)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제일 크다.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花盤)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여수석인(麗水石人)은 임진왜란 당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는 석조물이다. 원래 7개였다고 하나 6개는 없어지고, 두건에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전형적인 문인(文人)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석상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 하나의 비석으로 당시의 의인전술(擬人戰術)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조선 중기 돌 신앙으로서의 민속학적 가치와 조각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망해루(望海樓)는 진남관 앞에 새로 지은 2층 누각은 전라좌수영의 문루 역할을 했던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1991년 새롭게 지어졌다. 망해루 안쪽 진남관 매표소에 세워진 안내판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이 있다. 진남관 삼문(三門) 현판은 통제문(統制門) 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군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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