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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국보 제29호)의 명문 해석(銘文 解釋)

들풀/이영일 2015. 11. 18. 19:09

 성덕대왕신종 명문 해석(聖德大王神鍾 之銘 解釋):「朝散大夫(조산대부) 前太子(전태자) 通議郞(통의랑) 翰林郞(한림랑) 金弼衆(김필중)이 왕명을 받들어 짓다.

  ‘궁극적인 묘한 도리는 형상의 바깥에까지를 포함하므로, 아무리 그 모습을 보려고 하여도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대음(大音)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곳에 진동하고 있지만 이를 아무리 듣고자하여도 도저히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기설법(隨機說法)인 방편가설(方便假說)을 열어 삼진(三眞)의 깊은 이치를 관찰하시고, 신종(神鍾)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 범종(梵鐘)에 대한 기원을 상고해 보니, 불토(佛土)인 인도에서는 카니시카왕 때부터이고, 당향(唐鄕)인 중국에서는 고연(鼓延)이 시초였다. 속은 텅 비었으나 능히 울려 퍼져서 그 메아리는 다함이 없으며, 무거워서 굴리기 어려우나 그 몸체는 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임금의 으뜸가는 공훈(功勳)을 표면에 새기니 중생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또한 이 종소리에 달려 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덕(德)은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으며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높이 빛났다. 왕께서는 항상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발탁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고, 예(禮)와 악(樂)을 숭상(崇尙)하여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권장(勸獎)하였다. 들에서는 농부들이 천하의 대본(大本)인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에는 사치한 것은 전혀 없었다. 풍속(風俗)과 민심(民心)은 금옥(金玉)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는 문학(文學)과 재주(才能)를 숭상하였다.

  태자(太子)로 책봉하였던 아들 중경(重慶)이 715년 뜻밖에 죽어 영가(靈駕)가 되었으므로 늙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40여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병란(兵亂)으로 백성들을 놀라게 하거나 시끄럽게 한 적이 없는 태평성세(太平成歲)였다. 그러므로 사방 이웃 나라들이 만리(萬里)의 이국(異國)으로부터 와서 주인으로 섬겼으며 오직 흠모(欽慕)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겨누고 넘보는 자가 없었다. 어찌 연(燕)나라의 소왕(昭王)과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어진 선비를 등용하여 서융(西戎)을 제패하고,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무도(武道)로써 천하를 서로 탈취한 것과 나란히 비교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붕거(崩去)를 예측할 수 없었으며, 세월이 무상하여 천년이라는 세월도 어느덧 지나가는 지라 돌아 가신지도 벌써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근래에 효자이신 경덕대왕이 살아계실 때 왕업을 이어받아 모든 국정을 감독하고 백성을 어루만졌다. 일찍이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어 부왕인 성덕대왕이 승하하였으므로 궐전(闕殿)에 임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여 추모의 정이 더욱 처량하고, 명복(冥福)을 빌고자하는 생각은 다시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대종 일구(一口)를 주조코자 하였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득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임금이신 혜공대왕(惠恭大王)께서는 행(行)은 조종에 명합하고, 뜻은 불교의 지극한 진리에 부합하였으며, 수승(殊勝)한 상서는 천고(千古)에 특이하며, 아름다운 덕망은 당시에 으뜸이었다. 경주의 육가(六街)에서는 용이 상서로운 비와 구름을 옥계(玉階)에 뿌리고 덮으며, 구천의 북소리는 금궐(金闕)에 진동하였다. 쌀알이 꽉꽉 찬 벼 이삭이 전국의 들판에 주렁주렁 드리웠고, 경사스러운 구름은 경사의 하늘을 훤하게 밝혔으니, 이는 혜공왕의 생일을 경하한 것이며, 또한 왕이 8세 때 즉위한 후,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친정(親政)하게 된 서응(瑞應)인 것이다.

살펴보건대 소덕태후(炤德太后)의 은혜는 땅과 같이 평등하여 백성들을 인으로써 교화하고, 마음은 밝은 달과 같아서 부자의 효성을 권장하였다. 이는 곧 아침에는 외삼촌(元舅)의 현명함이 있고, 저녁에는 충신들의 보필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왕은 신하들이 제언하는 안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무슨 일을 결행한들 잘못됨이 있었겠는가? 경덕왕(景德王)의 유언에 따라 숙원을 이루고자 유사(有司)는 주선(周旋)을 맡고, 종(鍾)의 기술자는 설계하여 본을 만들었으니 이 해가 바로 혜공왕(惠恭王) 7년(771년) 12월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와 달이 밤과 낮에 서로 빛을 빌리며, 음과 양이 서로 그 기를 조화하여 바람은 온화하고 하늘을 맑았다.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소리는 용음(龍吟)과 같았다. 메아리가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인 색구경천(色究竟天)에까지 들리고, 밑으로는 무저(無底)의 가장 아래인 금륜제(金輪際)에까지 통하였다. 모양을 보는 자는 모두 신기하다 칭찬하고, 소리를 듣는 이는 복을 받았다. 이 신종을 주조한 인연으로 존령(尊靈)의 명복을 도우며, 보문(普聞)의 맑은 메아리를 듣고 무설(無說)의 법정(法筳)에 올라, 삼명(三明)의 수승(殊勝)한 마음에 결합하고, 일승(一乘)의 진경(眞境)에 이르며, 내지 모든 경악(瓊萼)들이 금가(金柯)와 함께 길이 번창하고, 나라의 대업은 철위산(鐵圍山)보다 더욱 견고하며,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그 지혜가 같아서 모두 함께 진구(塵區)인 중생의 미혹한 세계로부터 벗어나, 아울러 각로(覺路)에 오르기를 원하옵나이다.

  신 필중(弼衆)은 옹졸하며 재주가 없으나 감히 왕명을 받들어 반초(班超)의 붓을 빌리고, 육좌(陸佐)의 말을 따라 혜공왕께서 원하시는 성스러운 지시에 따라 종명(鐘銘)을 짓게 되었다. 한림대서생(翰林臺書生) 대마나(大奈麻) 김백환(金苩皖)이 종명을 쓰다.」(자료출처: 진천종박물관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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