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 현기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 玄機塔碑. 보물 제361호)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大鏡大師)의 탑비로, 보리사지(菩提寺址)에서 발견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대경대사는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禪)을 연구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大鏡)’, 탑 이름을 ‘현기(玄機)’라고 내렸다.
비의 높이가 3.5미터인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는 납작한 머리 모습을 하고 있고, 거북등 주위에는 꼬아 놓은 실 모양의 무늬가 띠를 두르듯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거북돌이 크기에 비하여 납작하며, 비의 갓인 머릿돌은 너무 크게 만들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의 무늬가 매우 힘차게 조각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거북받침돌(龜趺)은 화강석으로 거북머리가 용머리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머릿돌(螭首)의 구름과 용을 매우 생동감있게 조각되었다. 비몸돌은 사암(砂岩)이며, 머릿돌의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말미에 ‘天福四年歲次己亥’라 적혀 있어 태조 22년(939)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 글씨는 폭 2.5센티미터 정도의 구양순체(歐陽詢體)의 해서로, 획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살린 데서 오는 강인함이 묻어나는데, 고려 전기의 특징이 잘 담겨 있는 부분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경대사의 성(姓)은 김(金)이고, 충남 남포(藍浦) 출신인데, 신라 경문왕 10년(870) 9세 때 무량수사(無量壽寺)로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주종(住宗) 법사에게서 화엄(華嚴)을 공부하고, 뒤에는 선종에 치중하여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선사에게 선(禪)을 배웠다. 그 후 당나라로 가서 운거 도응(雲居 道膺)으로부터 법을 배운 후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하여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소백산에 은거했는데, 고려 태조가 그를 맞이하여 법을 듣고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인 지평(砥平) 보리사(菩提寺)의 주지로 봉했다. 대경대사는 이곳에서 태조 13년(930)에 입적하였는데, 그 때의 나이는 69세, 법랍은 60세였다.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와 현기(玄機)라는 탑호를 내리는 한편,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의 글을 짓게 하고 이환추(李桓樞)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다. 939년에 이르러 대경대사의 제자 최문윤(崔文尹)이 비문을 새겨 비가 세워졌으며, 태종 25년(942)에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비몸돌 뒷면에 새겨졌다. 이 음기에 의해서 그 문하에 융천(融闡), 흔정(昕政), 연육(連育, 총혜(聰惠), 장초(莊礎), 정잠(定岑) 등 500여 명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대경대사현기탑(大鏡大師玄機塔)은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에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은 대경대사의 행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