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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상 전돌(四天王像 塼)

들풀/이영일 2015. 12. 23. 07:30

  사천왕상 전돌(四天王像 塼)은 경주 배반동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서 출토된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통일신라) 670년경 사천왕사 목탑의 기단에 붙인 것이다. ‘전(塼)’은 흙으로 구운 벽돌이라는 뜻이다.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은 기단 네 면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3개씩 총 24개가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지키는 형태로 배치되지만, 사천왕사 탑의 기단에는 3개의 신장상(神將像)만으로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최고의 조각가 당시의 명장(名匠)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에 사천왕상을 조성하였고, 이어 사천왕사도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을 사방에서 호위하며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장이 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지(慶州 四天王寺址, 사적 제8호)는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신문왕릉 옆·선덕여왕릉 아래있는 신라의 절터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鷄林都督府)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文武王, 661-681)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密敎)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龜趺)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兜率歌)’,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불국토(佛國土)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절들이 별처럼 많았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제3(卷第三) 흥법(興法) 제3(第三)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불교의 토착화를 위해 본래부터 불교의 인연이 깊었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었고, 이 설은 본격적인 불국토설(佛國土說)로 전개되었다. 국가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대중적인 종교로 변모시켰으며, 불교를 통해 사회 안정을 이루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포용하고 융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통일 후에는 주로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 등의 종파가 유행하였고, 하대에는 선종(禪宗)이 전래되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는 등 선종 불교가 주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7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