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조선왕릉-구리 동구릉의 원릉(九里 東九陵 元陵. 사적 제193호)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년~1805) 김씨의 쌍능이다.
원능의 구성: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러 만든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다. 좌우 세호 중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기어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능의 중간에 놓인 사각옥개형 장명등은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비율과 입체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석인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석인의 얼굴에서도 잔잔히 머금고 있는 미소를 을 수가 있다.
원능의 역사: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은 1660년(현종 1) 10월 효종 능인 영릉이 조영되었던 곳인데,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천봉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하여, 끝내는 당론으로 번져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 5)에는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영조의 생애이야기: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1721년에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그의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1724년 이러한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조의 양을 감소시키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과감하고 개혁적인 조치들을 단행하여 조선 후기 나라의 기틀을 재차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1762년(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당쟁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5일 춘추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영조의 일화: 영조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숙종의 서자이다. 비록 왕자이긴 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궁궐 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천시 받으며 어렵게 성장하였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이 승하하기 이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고, 양주땅 고령산 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매우 초라하였다. 궁중예법에 따라 능호나 원호를 붙일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이 늘 맘에 걸렸던 영조는 오랜 노력 끝에 어머니의 묘를 간신히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녕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여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녕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녕원 능참봉에 제수하였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자신의 출생 신분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평생 큰 아픔을 삭여야 했다.
정순왕후의 생애이야기: 정순왕후는 1745년(영조 21) 11월 10일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태어났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759년(영조 35) 6월 22일,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의 친정은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으나,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던 아들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이 갈등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순왕후가 빌미를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승하하고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다음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1805년(순조 5) 1월 12일 춘추 61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여, 그 해 6월 20일 원릉의 영조 옆에 예장되었다.
정순왕후의 일화: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원릉 제향일은 매년 양력 4월 22일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동구릉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3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