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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의 숭릉(九里 東九陵 崇陵. 사적 제193호)

들풀/이영일 2016. 1. 11. 11:18

  세계유산 조선왕릉-구리 동구릉의 숭릉(九里 東九陵 崇陵. 사적 제193호)은 조선 제18대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과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김씨의 쌍릉으로 동구릉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의 구성: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의 형식이다. 숙종 즉위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숙종 10년(1684)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 옆에 나란히 조성하였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능역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멀고 정자각이 경사지 위에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한 모습이 돋보인다. 능침 주위 유물도 빼어나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陵寢)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曲墻) 안의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각 2쌍과 망주석(望柱石, 무덤장식 돌기둥) 1쌍이 초계(初階)를 이루었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長明燈), 문석인(文石人) 1쌍과 석마 (石馬)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下階)에는 무석인(武石人)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細虎)’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이 석물 상당수가 '재활용'된 것이란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숙종은 1674년 숭릉을 조성하며 어머니 명성왕후의 뜻을 받들어 효종의 옛 영릉(寧陵) 터에 있는 석물을 재사용하도록 명했다 원래 영릉은 동구릉 내 건원릉(健元陵. 태조릉) 서쪽에 있다가 1673년 현재의 경기 여주시로 옮겨진 상태였다. 당시는 천릉한 영릉에 다시 효종의 비 인선왕후 능을 조성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재활용은 '백성들이 너무 곤궁해지니 재정 지출을 줄인다'는 의도였다. 옛 영릉에 썻던 석물을 이미 땅 속에 파묻은 상태였으나 이를 꺼내 개보수에서 사용했다. 재활용 선례가 생기자 이후 다른 여러 왕릉도 이를 따랐다. 1731년 장릉(長陵)을 옮기거나 1856년 인릉(仁陵)과 1864년 예릉(睿陵)을 조성할 때도 옛 석물을 사용했다. 왕릉 규정은 조정에서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는 대상이라 쉽게 바꿀 수 없다. 백성을 걱정한 왕실의 마음이 석물 재활용이란 독특한 전통을 만들었다.

  숭릉의 역사: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 8월 18일 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월 11일에 발인하여,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12월 7일에 소렴하고, 12월 9일에 대렴하였으며, 1684년 4월 3일에 발인하여 4월 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현종의 생애이야기: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맏아들로, 효종이 세자의 몸으로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1641년(인조 19) 2월 4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1649년(인조 27)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도 함께 세손을 책봉되었고, 그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잇자 세자 자리에 올랐다. 1651년(효종 2) 11세의 나이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1659년(현종 즉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창덕궁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현종은 군비를 강화하고 재정구조를 다시 정비하는 등 양난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 왕조의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효종의 상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계속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종은 1674년(현종 15) 8월 18일 34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현종의 일화: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뿐만 아니었다. 한번은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런 효성과 자애로움은 조부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명성왕후 생애이야기: 명성왕후는 1634년(인조 12) 5월 17일 돈령부영사 김우명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659년(현종 즉위) 5월 9일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한 때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현종 승하 9년 후인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에서 42세로 승하하여 현종의 숭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소생으로는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는데, 이 가운데 명선과 명혜공주는 출가 전에 일찍 죽었다.

  명성왕후 일화: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당쟁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당시 명성왕후는 어린 숙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서인 김우명을 아버지로 둔 명성왕후 역시 수렴청정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사건을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밤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숭릉 제향일은 매년 음력 8월 18일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동구릉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3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