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탑골공원(서울 塔골公園, 사적 제354호)은 조선시대 원각사터(圓覺寺址)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불리운다. 원각사(圓覺寺)는 고려 때 흥복사(興福寺)라 불린 절로,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 때 절이 폐사(廢寺)되었다. 그 후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곳에 서양식 공원을 세웠으나, 그 이유와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원 안에는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국보 제2호)과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독립만세 부조판·손병희 선생의 동상들도 있다.
탑골공원 내에 모아둔 여러 석재유구들은 도시개발과정에서 출토된 부재들이 있다. 인물상 3점은 원각사 탑(圓覺寺 塔)의 주의를 호위하던 신장상(神將像)이나 보살상(菩薩像)으로 추정되고, 연화문(蓮花紋)이 새겨진 난간석(欄干石)은 원각사 탑 외각을 둘린 부재로 여겨진다. 복청교(福淸橋)라고 음각된 교명주(橋名柱)는 원래 교보문고 뒤편의 광화문우채국 북측지점에 있었던 혜정교(惠政橋)인데,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던 다리로써 중학천(中學川)이 청계천(淸溪川)으로 합류하기 전의 중학천 하류에 걸쳐져 있었다. 일제강점기하(1926)에 혜정교를 개축하면서, 다리이름을 복청교라고 새로이 개명(改名)하면서 만든 교명주로 보인다.
발굴출토 우물(發掘出土井)은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 사업 때 발견된 원통형으로 직경 1.3m이며 잔존 깊이는 5.2.m에 달한다. 내부는 회색을 띤 직사각형 벽돌이란 사용재료, 축조 방법으로 미뤄 조선말기(대한제국기)에 조성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된 우물로 판단된다. 서울 4대문 안에서 민간용 우물이 발견된 사례가 드믄 사정에 비출 때 이 우물은 조선후기 한양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시계 앙부일구 대석(仰釜日晷 臺石) 부재는 조선시대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에는 두 곳에 해시계를 설치하여 시간을 알려줬다. 1437년(세종 19)에 처음 시설하였는데 하나는 혜정교에, 다른 하나는 종묘 앞에다 두었다. 임진왜란 때 유실된 해시계는 조선후기에 다시 제작하였으며, 보물로 지정된 두 점이 전해지는데 세종 때의 구조와 형식을 계승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이 대석은 둘 가운데 종묘 앞에 있던 해시계 받침돌로서 대한제국기인 1898년과 1899년 사이에 벌어진 종로를 통하는 전차궤도 부설 공사를 인해 받침돌만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알려져 있다.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1930년대라는 설도 전해진다.
서울 탑골공원은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탑골공원 팔각정(塔골公園 八角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은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국인 브라운이 조성한 현대식 공원으로 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으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또는 탑동공원이라 불리웠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다. 황실공원으로 제실, 음악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시대에는 시민들이 울적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 99, 외 탑골공원 (종로2가)
*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101
*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189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8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