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에는 박제상순국비(朴堤上殉國碑), 최익현선생순국비(崔益鉉先生殉國碑), 조선통신사비(朝鮮 通信使碑), 덕혜옹주결혼기념비(德惠翁主結婚記念碑), 역관순난비(譯官殉難碑0, 김성일시비(金誠一詩碑) 등 한민족사(韓民族史)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다
대마도(對馬島)는 동경129', 북위 34',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거리는 49.5㎞(일본 후쿠오카까지 138㎞), 면적은 708㎢ (울릉도 10배) 동서 폭 18㎞, 남북 길이 82㎞, 본 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으며 그 중 5개 섬이 유인섬이다. 본 섬은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고, 이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행정은 1市 6町, 전체인구는 4만명, 특산품은 진주, 와카타벼루, 타이슈도자기, 카스마키, 토속주(시라타케, 야마네코), 오징어, 전복, 소라, 표고버섯, 메밀국수, 로쿠베 섬 전체의 88%가 산지이며 주민들은 주로 임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6개의 정(町)으로 구분된 지역 중 이즈하라가 제일 큰 도시이며 히타카츠가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대마도의 인구 중 약 1만2천여 명 정도가 이즈하라에 거주하고 있다. 대마도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대마도의 삼나무를 모두 베어내면 일본인구가 약 4년간 벌어들이는 외화수익과 맞먹는다고 한다.
대마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신석기시대부터 한일문화의 중개지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선사시대는 물론 역사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산이 많고 농경지가 협소하여 주민 생활품의 자급자족이 어려운 실정이었으므로 그 대부분을 다른 지역에서 구입하거나 의존해 왔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 남부 지역은 중요한 구입선의 하나였다. 기원전 2~3세기에는 일본에 농경문화가 정착되고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등 일본 역사상 중요한 시기이다. 마제석기, 무문토기, 관옥, 석관묘 등 한국 청동기 문화 내용이 대마에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남부지방에서는 이시기의 대마유물이 전연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마는 일본에서는 과거부터 대륙문화 수용의 창구로서 역할을 다하는 곳이므로 중요지역으로 여겨 왔으나 한국입장에서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지금도 일본에 속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919~1392)와 일본 사이에는 정식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13세기 후반이 되면서 몽고 침입이 양국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274년과 1281년의 두 번에 걸쳐 원나라(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여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과 고려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후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14세기 후반이다. 1350년 이후 일본 왜구가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약탈하였다. 고려 정부는 이것을 외교 교섭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일본 室町幕府(무로마치 정부)에 왜구 단속요청을 위한 서신을 여러 번 보냈다. 이것에 대해서 주로 대응한 것은 금천씨나 대내시 종씨 등 서일본의 대명 들이었다. 1392년 고려의 뒤를 이어서 성립된 조선왕조는 왜구 회유정책을 행하였다. 조선왕조의 대 일본인 정책에 대하여 대마도주였던 종씨도 민감했다. 종정무는 도주권 확립과 조선과의 외교에 힘을 쏟아서 왜구 금지를 위해서 노력했다. 이 결과 종정무는 조선왕조에서 깊은 신뢰를 얻어 한일 관계상의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1418년 종정무는 병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왕조는 이예(李藝)를 대마도원통사(圓通寺)에 보내 조문했다. 종정무가 죽은 뒤 왜구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1419년 중국을 향해가는 왜구들이 한국 연안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왕조는 대마를 토벌하는 것을 결정했다. 이 때 전 국왕인 태종에 의한 선전포고문에는 ‘대마는 원래 조선 땅 이였는데 벽지이며 좁은 땅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일을 묵인해 왔다.’ 라고하고 있다. 이 대마는 원래 조선 땅이다. 라는 인식은 한국 국내에서도 오래 남아 있다. 드디어 조선은 17,285명의 조선군이 대마를 향해 출발했다. 소위 기해동정이다. 이 사건 이후 대마도와 조선 왕조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단절 되었다. 세종은 일본과의 평화외교를 추진했다. 대마와 조선 왕조 사이의 관계는 얼마 안돼서 회복되어 이번에는 대마가 일본과의 외교기점으로 되어간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 할 경우 반드시 대마를 들르고 종씨에게서 ‘문인’이라고 하는 도항 증명서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대마도주의 문인제도가 확립되는 것은 1438년의 일이다. 이 제도로 종정성의 지위는 한일관계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 1443년에는 계해약조가 체결되었다. 조선왕조는 대마도주에게 연간 세견선 50척을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면서 삼포를 개항하게 되었다. 현재 대마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대륙계 문물인 불상, 경전, 청자 등이 수많이 남아있다. 이들 대부분은 주로 무로마치시대(실정시대: 1338~1578)에 소오(종)씨가 한반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예를 들어 대장경, 대반야경을 보더라도 1416년부터 1487년까지인 71년 동안에 종정무, 종정성, 종성직, 종정국 등의 도주(제7대~제10대)에 의해 적어도 9세트가 대마에 도래 되었고 그 중 몇 점은 지금도 도내에 신사, 사원 등에 남아 있다. 소오(종)씨는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92~1333)중기부터 말기까지 약 230년 동안에 대마의 방대한 기록인 ‘종가문고사료’는 대마자료관 소장 자료 중 중심이 되는 사료이나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14~15세기 왜구의 시대를 거쳐 소오(종)씨가 조선 무역의 실권을 독점해 갔던 무로마치(1338~1578)에 일본과 조선은 대체로 평화로운 외교관계에 있었다. 이때의 대마도주는 종정성으로서 거처를 사가(峰町)에 두고 조선과 활발히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화로운 양국관계에 있어 조선국왕은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足利)씨를 일본국왕으로 인정하고 1428년 이래 수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정식 사절단을 파견하였다.(통신사의 시초) 그러나 이러한 우호관계는 1590년 이후 일본 국내 사정에 의해 중단되어 버렸다. 그 후 단절된 조선과의 관계가 소오(종)씨의 노력으로 부활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전쟁 후인 1607년이었다. 이후 조선국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우호적인 정책을 이어받은 에도(江戶幕府)에 대해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냈다. 엄격한 쇄국정책 하에 에도(현 도쿄) 막부에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외교사절이 조선통신사이다. 이러한 사절을 맞이하는 실무 담당인 대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이다. 1719년에 건너간 제9차 통신사의 제술관인 신유한과 아메노모리 호슈와의 교류는 특히 유명하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는 것 이 성신(誠信)의 교린(交隣)’ 임을 강조한 호슈의 외교철학은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 대마역사 민속자료관(對馬歷史 民俗資料館): 조선통신사행렬도, 초량왜관도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다. 민속자료관 일대에는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 "고려문(高麗門)", "성신지교린비(誠信之交隣碑)" 등이 있다.
⊙ 박제상순국비(朴堤上殉國碑)는 한국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가미아가타쵸 사고(佐護) 마나토(湊) 마을에 서 있는, 그야말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라 충신의 기념비이다. 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추정)은 신라의 충신이다. 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며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10년(426년)에 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갔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그를 신하로 삼으려는 인교 천황의 설득을 거절하다가 죽었다.
⊙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 160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대마도에는 이곳 외에 수많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을 가져다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 조선통신사이예공적비(朝鮮通信使李藝功績碑): 비문의 내용은『朝鮮前期通信使 忠肅公李藝 一三七三~一四四五. 이예(李藝)는 학성이씨(鶴城李氏)의 시조로 벼슬이 종이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使行은 조선전기의 十八回와 후기의 十二回를 합쳐 모두 三十回였다. 公은 그 중 六回의 使行에 正使 또는 副使로 참여하였으니, 조선역사상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公은 태종‧世宗 代에 일본‧유구‧대마도에 四十여회 파견되어 六六七명의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였으며,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朝日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수력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朝日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公은 외교업무로 대마도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島主 宗貞茂의 사망 시에는 왕명으로 원통사(圓通寺)를 찾아 조문하였다. 公의 업적이 한일 양국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二00五年 二月에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니,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오늘 公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현창하고자 이碑를 세운다』
⊙ 고려문(高麗門): 화재로 소실 된 것을 재건축 하였다. 조선통신사를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 이라고 한다.
⊙ 성신지교린비(誠信之交隣碑): 아메노모리호슈(1668-1755)선생이 주창한 "성신지교린"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호슈 선생은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서 생겨나기도 하였다.
⊙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德惠翁主結婚記念碑):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우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결혼하였다. 이 비는 두 분의 성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두 분은 딸 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으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화되어 1955년에 이혼하기에 이른다.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 후,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 만제키다리(萬關橋):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써 인공적으로 굴삭한 해협에 다리를 세웠으며 이는 현재 둘로 나눠진 대마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만조시의 조류는 여러 겹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초대 만제키바시는 1900년 완성한 옛 일본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 길이 100m, 폭5.5m, 높이 약 36m이다. 2대 만제키바시는 1956년 완성한 낙도진흥법에 따라 완성된 아치형 철교. 길이 약 81m, 폭 5.5m, 높이 약 30m로 이 다리의 완성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3대 만제키바시는 1996년 완성한 전체 길이 210m, 폭 10m. 섬 전체의 도로망도 정비되어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 졌다.
⊙ 미네쵸역사 민속자료관(峰町歷史 民俗資料館): 미네쵸에는 죠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유적이 분포되어 있어, 그 시대의 생활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선조가 남긴 귀중한 문화유산이 수없이 존재하며 그것을 집약시켜놓은 본 시설은 역사를 배우는 거점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 조선역관사 조난위령비(朝鮮譯官使 遭難慰靈碑): 1703년 음력 2월 5일 아침, 108명을 태운 조선통신사의 역관사 배가 대마도를 향해 부산을 출발하였으나, 기상의 급변으로 인해 와니우라를 목전에 두고 조난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의 역사적 배경이 선린우호를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였다는 것을 반영하여 1991년 3월 20일 위령비가 세워졌다.
⊙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대마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카미쓰시마는 한국까지 49.5㎞의 거리로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까지 볼 수 있는 그야말로「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한다. 지리적,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서울 파고다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고, 한국산 재료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 풍을 고집하였다.
⊙ 미우다해수욕장(三宇田海水浴場): 1996년「일본의 풍경, 100선」에 선정된 해수욕장. 대마도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 해변으로 에메랄드 그린의 얇은 바다는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캠프장 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 원통사(圓通寺): 무로마치시대 대마도주 종정무의 집무실로 알려지고 있는 엔슈지(圓通寺)에는 2005년에 건립한 조선통신사이예공적비(朝鮮通信使李藝功績碑)가 서있다. 사찰 정문 오른쪽에 고려종(高麗鐘)이 걸려 있어서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위치는 대마도시 미네마치 사가(峰町) 엔슈지(圓通寺)로 히타카츠 항에 내려서 한국전망대를 보고, 박제상순국비(朴堤上殉國碑)를 거쳐서 이즈하라로 내려가는 미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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