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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對馬島)속의 한민족사(韓民族史) 탐방 팸투어

들풀/이영일 2016. 2. 3. 12:42

  (주)발해투어(대표 황백현)은 한국관광클럽(회장 이충숙, (주)센타투어 대표) 전국 회원사와 언론사 기자단 40명을 초청하여 이야기(Story)가 있는 행복(Happy)한 일본 대마도 팸투어를 2016년 1월 31일(월)부터 2월 1일(월)까지 1박2일간 실시하였다. 이번 팸투어는 일본 대마도속에 우리 선조들의 옛 발자취 탐방을 통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대마도관광의 활성화를 위하여 마련되었다.

  첫날은 09시 30분 오션플라워호 부산 출항으로 1시간 10분만에 대마도 히타카츠항 도착▶ 대마도주(對馬島主) 종가(宗家) 제16대 ‘소오하루야쓰(宗 晴康, 1475∼1563)공양탑(供養塔)’ 탐방▶ ‘2000년일한우호국제해협횡단도항기념비’, 은혜의교(恩海義嶠), ‘러시아병사최초상륙지’, ‘니시도마리(西泊)해안길’, 동백나무 숲으로 뒤덮은 ‘도노자키(殿崎)전망공원’, 일본 해변 100선의 ‘미우다해수욕장(三宇田浜海水浴場)’, 캠핑장, 나기사노유(渚の湯), 일본해전 100주년을 기념하여 부상당한 러시아 해군병사들을 우물가로 안내하고 밤에는 민가에 나누어 숙박 시키는 등 아군과 적군 상관없이 극진히 간호해 보살피는 ‘일러 우호의 부조상’이 있는 언덕 등 조선통신사 올레길 약 1시간 30분 트레킹▶ ‘국경의 섬’을 실감하게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조망(釜山眺望)하고 1703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역관사(譯官使)를 태운 배가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가던 중 기상 급변으로 조난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의 위령비(慰靈碑) ‘조선역관사순란지비(朝鮮國譯官使巡難之碑)’가 주변에 있는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풍수지리가로 미래를 예언하던 격암 남사고(格菴 南師古)의 임진왜란 예언지와 임진왜란 때 선발대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부산으로 출진한 오우라(大浦)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만들었던 고려 현종 때 판각한 고려 최초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백제인이 심은 수령 1500년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장송사(長松寺)’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고려약사여래불(高麗藥師如來佛), 고려범종(高麗梵鐘), 조선이 일본 대마도에 파견한 공식 조선통신사로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고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조일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업적과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 수력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한 ‘조선통신사이예공적비(朝鮮通信使李藝功績碑)’, 보협인다라니경을 봉안한 ‘보협인탑(寶篋印塔탑)’이 있는 ‘엔쯔지(圓通寺)’▶ 겹겹이 얽힌 산과 바다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이어진 리아스식(rias coast)해안의 대마도판 하롱베이를 감상하는 ‘에보시타케(鳥帽子岳)전망대’ 200∼300년 수령의 삼나무 숲길과 도요타마치(豊玉町)의 유래이기도 한 도요타미히메(豊玉姬)와 우미히코(海幸彦), 야마히코(山幸彦) 형제 신화로 알려진 히코호호데코토(彦火火出見尊)를 모시는 해궁(海宮)으로 바다신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이종무 장군의 대승지이며 백제 성왕이 일본에 보내는 불상과 일본의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가 통과한 ‘소선월(小船越)’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써 인공적으로 굴삭한 해협의 다리로 대마의 두 섬을 잊는 교통 요지 ‘만제키바시(万關橋)’ 대마도 최초 운하(運河)인 대선월(大船越) 탐방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둘째날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을 전개하다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가 옥사한 ‘면암최익현선생순국비(勉菴崔益鉉先生殉國碑)’와 구한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金鶴鎭)의 친필(親筆)인 ‘수선(修善)’ 현판(懸板)과 한국종(韓國鐘)이 있는 656년 백제 귀족 법묘(法妙) 비구니가 설립한 ‘수야마토츠안(修善寺)’ 최익현 선생이 1906년 대마도로 잡혀와 최초로 구금당하셨던 ‘최익현선생초당지(崔益鉉先生初堂趾)’▶ 1906년 감옥 간수가 머리(상투)를 자르려하자 호통을 치시고 단식을 결행한 31일 만에 아사순국하신 ‘최익현선생순국지(崔益鉉先生殉國趾)’▶ 절의 정원 앞의 시비에 ‘한 집에 의관 갖춘 두 나라 신하(一堂簪蓋兩邦臣)/지역은 달라도 식과 의리는 균등하도다(區域雖殊義則均)/정성을 다해 접대하므로 긴장이 풀리고 환대에 족하니(尊俎雍容歡意足)/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묻지 마시오(傍人莫問主兼賓)’의 ‘조선통신사학봉김성일선생시비(朝鮮通信使鶴峰金誠日先生詩碑)’가 있는 세이잔지(西山寺)▶ 지진과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 재해로 부터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 다른 곳으로 화재가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돌담의 형태의 ‘방화벽(放火壁)’ 풍랑으로 표류한 조선인 어부가 머물던 집단수용소 ‘표민옥적(瓢民屋跡)’▶ 춘향전(春香傳)을 일본어로 최초로 번역한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 기념관’ 대마도에 가톨릭 씨를 최초로 뿌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의 ‘마리아 신사’가 있는 일본 천황신을 봉안한 ‘하치만궁신사(八幡宮神社)’ 대마도판 왕자의 난, ‘금석성적(錦石城跡)’ 막부의 사자와 조선 통신사가 이 길을 수없이 지나다니고 유숙하였던 유적 ‘조선통신사접우노지비(朝鮮通信使幕府接遇地)’ 표석(標石)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德惠翁主)가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우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결혼을 축하의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된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德惠翁主結婚記念碑)’, 두 분은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으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화되어 1955년에 이혼하고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 후,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조선통신사행렬도(朝鮮通信使 行列圖), 초량왜관도(草梁倭館圖)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보관되어 있고, 또한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對馬歷史民俗資料館)’,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州, 1668-1755)선생이 주창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성신지교린의 ‘성신지교린비(誠信之交隣碑)’, 1607~1811(21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 에도시대(江戶時代, 1600∼1868)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 만든 영은문 고려문(高麗門) 일본국가 1호 소학교 적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州, 1668-1755)가 부산 왜관에 와서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하고 유학을 숭배하여 일본 최초의 외국어 교육기관인 한글학교(韓語司/嚴原韓語學所)▶ 사무라이 거리와 저택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1862~1921)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비서였던 고쿠분 쇼타로의 죽음을 애도해 쓴 비문에 ‘종삼위훈일등국분상태랑지묘 후작 이완용 서(從三位勳一等國分象太郞之墓 侯爵 李完用 書)’라고 쓴 매국노(賣國奴) 이완용(李完用)의 친필(親筆) 비석(碑石)이 있는 천택사(國分寺)▶ 진귀한 화강암으로 뒤덮인 강 청류를 중심으로 대자연의 경관을 살려만든 레저공원인 ‘아유모도시자연공원(鮎もどし自然公園)’ 트래킹▶ 면세점 쇼핑 및 자유휴식▶ 15시 오션플라호 대마도 이즈하라항 출국하여 2시간 10분만에 부산항 입국으로 팸투어를 마무리 하였다.

  Land 발해투어(http://www.valhae.co.kr/ ∙ 부산 051-253-5887 ∙ 서울 02-3789-5887)는 대마도 전문 랜드로 황백현 대표는 한국 최초 대마도를 전공한 문학박사로 ‘Storytelling 대마도’의 저자(著者) 이기도 하다. (주)발해투어는 대마도 개척 20년을 맞아 그동안 성원에 보답하고자 수신기로 해설 청취, 태블릿으로 100년 전의 대마도 재현, 발해투어 황백현 대표이사가 저술한 ‘Storytelling 대마도’ 증정, 버스에 에그(포켓 WI-FI) 비치, 100V 플러그 비치, 석식에 야생 멧돼지 이시야끼 특식 등 6대 특전을 준비하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대마도 팸투어의 해설은 황백현 문학박사님이 직접 해 주셨다.

  일본(日本)의 쓰시마(對馬島)는 천혜의 깨끗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嚴原)는 동경 129도, 북위 34도에 위치하고, 한국에서는 49.5km, 일본 후쿠오카까지는 137km로 한국이 훨씬 가깝다. 면적은 709㎢로 거제도의 1.5배, 울릉도의 10배이다. 동서의 폭 18km, 남북은 82km이다. 본 섬은 상∙하대마도 2개와 109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으며 유인도(有人島)는 5개이다. 인구는 약 4만 5천명, 행정은 나가사키 현의 쓰시마 시(對馬市) 소속, 2군(카미아가타 군(上縣郡)/ 시모아가타 군(下縣郡) 6정(카미쓰시마 쵸(上對馬町)/ 카미아가타 쵸(上縣町)/ 미네 쵸(峰町)도요타마 쵸(豊玉町)/ 미쯔시마 쵸(美津島町)/ 이즈하라 쵸(嚴原町)로 구성되어있다. 주요산업은 임업과 어업, 서비스업이다.

  쓰시마(對馬)의 특성(特性)은 섬 전체의 88%가 산지이며 주민들은 주로 임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즈하라가 제일 큰 도시이며 히타카츠가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대마도의 인구 중 약 2만 명 정도가 이즈하라에 거주하고 있다. 대마도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대마도의 삼나무를 모두 베어내면 일본의 인구가 약 4년간 벌어들이는 외화 수익과 같다고 한다.

대마(對馬)의 어원(語原)은 조선시대 중기까지 경상도에 포함되어 있었고 대마도의 영주는 조선의 벼슬을 받았다. 대마도라 부르는 설에 대해 여러 가지 유래설 들이 있지만 주된 세 가지 유래로 중국의 역사서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에 진도(津島: 일본어로 쯔시마)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어원이 되어 대마도라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삼한인(옛 한민족)들이 두 개의 섬이라 하여 '두시마'라고 불렀다는 설, 일본사람들이 이 섬이 마치 두 마리 말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대마(對馬) 즉, 쓰시마라고 불렀다는 것이 어원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은 세 번째 설이다.

  한일관계(韓日關係)는 대마도는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의 창구로서 정거장 역할을 한 곳 이였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정벌하여 대마도주에게 항복을 받은 곳, 왜구의 조선침략 근거지로서 우리에겐 악연, 조선의 민간외교관 안용복이 감금당한 곳, 을사조약을 반대한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이 끌려가서 단식분사한 곳, 박제상 비, 조선역관사 비, 학봉 김성일 시비가 있는 곳, 임진왜란 전까지 친조선 이었으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집권 후 완전히 친막부(親幕府)로 기울어졌다. 매년 8월 첫째 토, 일요일 아리랑축제와 조선통신사 행렬이 이즈하라 시내에서 열리고 있다.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8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