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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193호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들풀/이영일 2016. 8. 8. 07:18

- 일본(日本)에 밀반출(密搬出) 되었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정부와 민간단체,

 남한과 북한의 협력으로 환수되어 북한의 원래 제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일본(日本) 밀반출(密搬出)은 러·일 전쟁(露·日 戰爭) 당시 1905년 일본군 제2사단 이케다 쇼스케(池田正介) 소장이 비문(碑文)을 읽어보고 자기네 조상들의 패전기록(敗戰記錄)을 알게 되자 일본으로 가져갔고, 러·일 전쟁 전승국 일본은 북관대첩비를「전리품(戰利品)」취급하여 천황(天皇)에게 바치는 예식을 치르고 야스쿠니신사(淸國神社)에서 보관하여 왔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정식 이름은「유명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有明朝鮮國咸境道壬辰義兵大捷碑)」이며,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관북,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義兵)들의 활동과 공로가 1500여 글자로 기록되어 있다. 함경북도 북평사(北評事) 직(職)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1565∼1642) 장군이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의병을 모아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격퇴한 공을 기려 조선 숙종 때 북평사(北評事)의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에 세운 전승기념비(戰勝紀念碑)로 크기는 높이 187cm, 너비 66cm이다.

   북관대첩비 반환운동(北關大捷碑 返還運動)은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던 조소앙(趙素昻)이 야스쿠니신사(淸國神社)에서 이 비를 발견하고는 비를 가져온 일본을 꾸짖는 글을 기고하면서 북관대첩비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재일 한국인 학자 최서면(崔書勉)이 우연하게 조소앙이 쓴 글을 1978년 읽게 되었고,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신사의 뒷뜰에 있다는 내용을 정부에 통보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처음으로 북관대첩비 반환을 요청하였다. 정문부의 후손인 해주 정씨 종친회는 비석이 확인된 직후부터 야스쿠니 신사에 반환청원서를 내고, 권궁사(權宮司)를 만나보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2003년 한국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요청하자 남한과 북한의 협의 후 일본 정부에 공식 요청이 있을 경우, 비를 반환할 수 있다는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확인 하였다. 2005년 3월 한일불교복지협의회가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 측과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합의문 채택결과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통보했다. 6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관대첩비 반환에 대해 합의되었다. 그해 10월 일본반출 100년 만에 비가 고국으로 돌아와 일반에 공개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잠시 전시된 후, 경복궁으로 옮겨져 11월에 공식 제막식이 이루어졌다. 2006년 2월 남북간에 북관대첩비 북한 환송에 관한 협의를 가져, 3월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어 3월 23일 원래자리인 함경북도 김책시에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복제비(複製碑)는 그해 4월 경복궁 고궁박물관 경내에 세웠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경내 (북관대첩비의 복제비)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2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