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사적 제117호)은 1873년(고종 10) 고종(高宗)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왕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의 북쪽 동산정원 녹산(鹿山)과 향원정(香遠亭) 사이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지었다. 그 해에 고종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기거 하면서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한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다.
- 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사적 제117호) -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다.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한 크게 사랑채 장안당(長安堂) · 안채 곤녕합(坤寧閤) · 부속건물 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아관파천 때까지 10년간 줄곳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호) 등이 있다.
- 사랑채 장안당(長安堂) -
- 안채 곤녕합(坤寧閤) -
- 부속건물 복수당(福綏堂) -
관문각 터(觀文閣址)와 전기 발상지: 건청궁 내 장안당 뒤쪽에 위치한 고종 10년(1873)에 관문각 터이다. 당초에 관문당(觀文堂)으로 불렀으나, 고종 12년(1875)에 어진을 봉안하고 관문각으로 고쳤다. 관문각은 원래는 전통적인 모조건물 이었으나 고종 28년(1891)에 러시아 건축가 세레친 사바틴(A. S. Sabatine)과 친군영(親軍營)이 공사를 맡아 서양식 2층(일부 3층)의 건물로 개축되었다. 최초의 양관(洋館)으로 불리기도 한 이 건물은 국왕의 서재 겸 집무실인 집옥재와 대조를 이뤘다. 집옥재와 관문각 사이에는 서양식 기계추 시계탑도 세워졌다.
고종은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향원지 북쪽에는 최초의 발전소를 지어 건청궁의 밤을 밝혔고, 향원지의 물을 이용한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전기를 '물불'이라 불렀다. 당시 전기의 도입은 에디슨전기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동아시아 최초였다. 그 무렵 에디슨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 ... 꿈만 같다!'
사바틴이 관문각에 기거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여 고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관문각이 헐린 시기는 광무 5년(1901) 이후로 보인다.
집옥재(集玉齎)는 고종의 서재로 쓰였다.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洋官)이라고도 불렀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건청궁은 이처럼 신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산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 의지가 외세에 의하여 꺾인 곳이기도 하다.
-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호)과 집옥재(集玉齎) -
경복궁 후원 영역인 신무문(神武門) 북쪽에는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경농재(慶農齋)와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던 내농포(內農圃), 왕이 군사훈련을 점검할 수 있는 경무대(景武臺) 등 여러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이 후원 영역에 총독관저를 짓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미국군정기에는 총독관저는 미군정장관 관저로, 그 이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다가 1960년에 ‘청와대(靑瓦臺)’라 개칭하였다.
고종이 건청궁에서 생활한 것은 10년 남짓한 세월뿐이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서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그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다 실패하고, 드디어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변복을 한 채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신무문(神武門)과 청와대(靑瓦臺) -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경복궁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헐리고,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다. 동쪽에 명성황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가 건청궁은 2007년에 복원되었다. (자료출처: 경복궁 두산백과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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