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수정전(景福宮 修政殿, 보물 제1760호)은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 서측에 있는 건물로써, 북쪽으로는 경회루(慶會樓, 국보 제224호)가 자리 잡고 있다. ‘수정(修政)’이란 ‘정사(政事)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현판 글씨는 중건 당시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조석원이 썼다.
조선시대 왕실업무(王室業務)를 위한 관청(官廳)으로는 광화문(光化門) 앞 육조거리에 있던 궐외각사(闕外各司)와 궁궐 안의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었다.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크게 네 부류였다.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교서관(校書館) 등 왕(王) 가까이서 보필하는 정치행정기구, 내반원(內班院), 상서원(尙瑞院), 상의원(尙衣院), 사옹원(司饔院), 사복시(司僕寺) 등 왕족(王族)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던 실무관서, 흠경각(欽敬閣), 보루원(報漏院), 관상감(觀象監), 간의대(簡儀臺) 등 천문(天文)과 시각(時刻)을 관측하는 과학부서(科學府書), 도총부(都摠府), 내병조(內兵曹), 선정관청(善政官廳), 충장위(忠壯衛) 등 궁궐수비와 왕족경호를 맡은 군사부서(軍使府署)이다. 궐내각사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정전은 세종 연간에는 학문을 연구하여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의 본산이었던 집현전(集賢殿)으로 쓰였다. 동쪽으로 사정전(思政殿)이 있어 왕의 영역과 신하들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 궐내각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정전(修政殿)은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왕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국기무처(國軍幾務處)를 여기에 두고, 이후 내각청사(內閣廳舍)로 사용되었다. 4면에는 행각과 남쪽의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제 때 훼철(毁撤)되고 현재는 본건물인 수정전만 남아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에는 4면의 행각과 남쪽으로 외행각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벽체와 창호가 훼철되었고, 그 일곽 또한 1915년 가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세우고자 하는 일제의 전초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며 모두 헐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 양식, 주칸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10칸, 측면4칸의 비교적 긴 장대한 건물로 남향으로 앉혀진 1고주7량가의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 단층 팔작지붕이다. 수정전(修政殿) 정면에는 네 벌대의 넓은 월대(月臺)가 조성되어 있다.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으며, 이것은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다섯 벌대나 되는 높은 건물기단 위에는 4각 초석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하였다. 높은 기단의 좌우 측면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를 설치하여 온돌방을 두었다. 평면은 정면10칸·측면4칸으로 앞면 퇴칸 주간을 넓게 하여 10칸의 도리방향을 모두 대청으로 터져있으며 좌우 및 후면의 퇴칸이 연결되어 내부 회랑 역할을 한다. 공포는 길게 뻗은 쇠서의 이익공 위에 소로를 높고 양봉한 보머리를 받으며 주심도리를 받아준다. 지붕의 용마루 및 내림마루엔 양성을 하고 취두·잡상을 배열했다. 건물의 짜임이 견고하고 창의력있는 구조다.
수정전(修政殿)은 외관, 가구부재 등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중건 당시의 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다. 근정전 서편의 궐내각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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