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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침전과 접견실, 덕수궁 함녕전과 덕홍전(德壽宮 咸寧殿 및 德弘殿)

들풀/이영일 2016. 10. 17. 07:40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의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의 환어와 함께 건립된 왕의 침전과 고종의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었고, 덕홍전(德弘殿)은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 보물 제820호)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寢殿)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에 화재로 불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6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황후의 침전이 따로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 고종이 다시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각(殿閣)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위쪽에 여러 가지 조각을 장식해 놓고 있다. 더욱이 지붕 모서리 부분에 조각들[雜像]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간결하게 장식한 익공 양식이며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몄다. 건물의 천장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고, 네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다.

   함녕전(咸寧殿)은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김구의 목숨을 살린 함녕전 대청전화: 1897년에는 고종의 침전과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되었다. 함녕전의 대청마루에 전화가 설치되자 고종은 필요할 때마다 대신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전화를 ‘대청 전화’라고 했는데 대청전화 덕분에 김구가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진 일화가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고종이 김구의 사형집행 서류를 검토 중 형집행 직전에 전화로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려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덕수궁 덕홍전(德壽宮 德弘殿)은 중화전(中和殿)의 동북쪽,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의 서쪽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었는데, 뒤에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덕홍전(德弘殿) 내부는 천장의 샹들리에나 봉황문양의 단청, 창방의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덕홍전에서 정관헌(靜觀軒)으로 이어지는 꽃담과 꽃담에 낸 무지개 모양의 유현문(惟賢門)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던 두 전각의 분위기와 화사하게 어울린다.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들을 설치하였다.

   1896년(건양 1)에 고종황제는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였다. 이 때 경운궁(慶運宮)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경복궁 태원전(泰元殿)에 모신 명성황후의 시신을 모실 빈전(殯殿)과 신주를 봉안할 혼전인 경소전(景昭殿)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여 1897년에 국장을 지낸 뒤에는 경효전(景孝殿)이라고 부르면서 혼전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에 큰 불이 일어나 불에 타고 말았는데, 명성황후의 신주는 준명전(濬明殿)의 서쪽 행각에 임시로 모셨고, 그 뒤에는 중명전(重眀殿)의 주변에 자리한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후에 경소전 터에 이전과 같은 규모의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지만, 1905년에 을사늑약의 체결로 인해 고종황제가 여전히 중명전에 머물렀기에 신주를 다시 옮기지는 못하였다. 고종황제가 함녕전으로 돌아온 뒤에도 신주는 여전히 수봉당에 봉안되었다.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고쳐 짓고서 덕홍전(德弘殿)이라고 불렀다.

   덕수궁의 내전인 함녕전과 덕홍전은 선조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기에 부득이 격식을 갖추지 못했지만, 고종 때에는 궁궐의 영역도 한껏 넓어지고 규모와 격식도 제대로 갖추었다. 한일합병 이후 덕수궁의 전각과 부지를 조금씩 허물어내던 일제는 덕수궁을 본격적으로 해체해 나갔다. 1931년에는 궁궐을 아예 상가 부지로 매각하려다가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한발 물러나 외전과 내전의 주요 전각을 남긴 상태로 공원화하여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오늘날의 덕수궁에 남은 전각들은 그렇게 지켜졌다. [자료: 문화재청, 네이버지식백과]

* 문화재 주소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정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3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