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의 원(原) 공간, 즉조당(卽阼堂) 일원

들풀/이영일 2016. 10. 20. 07:44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阼堂) 일원은 덕수궁의 모태가 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쳐했던 곳으로 인조 즉위 후 경운궁의 전각들 대부분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즉조당과 석어당(昔御堂) 두 건물만 보존되어 후에 경운궁의 중심이 되었다. 준명당(浚眀堂)은 고종황제가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세 건물은 1904년에 소실된 후 같은 해에 중건되었다.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阼堂)은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던 건물로서,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卽阼堂)이라 불렀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손수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옮겨온 뒤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었고, 한때 태극전(太極殿)·중화전(中和殿)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이 건립된 뒤부터는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상왕이 된 뒤 거처하던 궁궐로서 궁명(宮名)을 덕수궁으로 바꾼 뒤인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후비인 엄비(嚴妃)가 이곳에 거처하였다.

   건물의 위치는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인 대내(大內) 중앙 북쪽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화전의 바로 뒤에 높은 돌기단을 쌓고 세웠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浚明堂)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한편, 현관 앞 처마 밑에는 ‘즉조당(卽阼堂)’, 대청 앞 기둥 위쪽에는 ‘경운궁(慶運宮)’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놓았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로 기단은 긴 댓돌을 바른켜쌓기로 쌓은 높은 기단으로, 윗면에는 네모 전돌을 깔았으며 대청에 맞추어 기단 앞쪽에 3줄의 계단을 배열하였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도와 난간으로 연결된 준명당과 함께 계획된 것이며, 후원에 남아 있는 굴뚝은 주변의 풍치를 더하여 주고 있다.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眀堂)은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건물은 정면6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2·3·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으로 개방하였으며, 대청은 침전에서 흔히 쓰는 3칸대청이 아닌 2칸대청이다. 대청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다시 그 옆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여 즉조당의 누마루와 구성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경효전(景孝殿)과 흠문각(欽文閣)에 모셔져 있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화재로 준명전(濬明殿)과 그 서행각(西行閣)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명당은 불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그러나 이는 준명전과 준명당을 같은 건물로 착각한 데서 온 잘못된 판단이며,『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보면 현재의 준명당은 1904년에 중건된 것임이 분명하다. 후원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후원 조경방법을 일부나마 전해 주고 있다.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은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하였던 곳이다.

   건물은 긴 댓돌을 높이 쌓은 기단 위에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4각형 기둥을 세웠다. 기단 앞 가운데 5단 계단을 두 곳에 설치하였다. 1층은 정면8칸, 측면3칸,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굴도리집.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의 바로 뒤에 있다. 대청 앞쪽 2칸 위 퇴는 개방하고 그 양옆은 모두 문과 창을 달아서 독립된 구역을 설정하였는데, 이는 퇴의 안쪽에 대청이 있는 경우와 방이 있는 경우를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또, 대청이나 방을 더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 건물 뒤쪽에 가퇴(假退)를 덧단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맨 왼쪽 방에 설치하여 놓았다. 처마는 1·2층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은 우진각이다. 지붕마루에는 양성을 하지 않고, 아무런 장식기와나 잡상 등을 두지 않았다.

* 서궁 유폐와 인조반정의 현장, 석어당: 석어당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 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때 경운궁은 서궁(西宮)으로 불렀다. 서궁 유폐는 결국 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서 즉위한다. 유폐의 한이 맺혀 있던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36조의 죄를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새를 전하였다.

   덕수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층 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아래층에는 고종 어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자료: 네이버지식백과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정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3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