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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과 대한문(大漢門) 일원

들풀/이영일 2016. 10. 26. 07:24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純宗皇帝)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장수(長壽)를 빈다는 뜻을 담아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德壽宮) 자리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 金氏)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卽阼堂)과 석어당(昔御堂)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문(大漢門)은 1904년 덕수궁이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고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 이었는데, 환구단(圜丘壇) 건립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1904년 4월 '크게 편안하다'는 뜻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도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樑文)」을 보면 “황하(黃河)가 맑아지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시운(時運)을 맞았으므로 국운(國運)이 길이 창대(昌大)할 것이고 한양(漢陽)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나와 있다. 한양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우진각지붕집이다. 원래 정전(正殿)인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의 정면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錦川橋)는 1986년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대한문은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1년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33m 서쪽으로 물러앉게 되었다.[자료출처: 문화재청, 네이버지식백과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정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3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