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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일원

들풀/이영일 2016. 11. 20. 17:04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은 창경궁(昌慶宮)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이다. '명정(明政)은 밝은 정치를 펼치다'는 의미이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도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明政門)과 행각(行閣)이 명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와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齋室)로도 쓰였다.

   명정전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까만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용상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병풍을 설치하였다. 일월오악도는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도 한다. 왕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해와 달, 그리고 중국의 5악(岳) 중의 하나인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쿤룬산[崑崙山]을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임금은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함을 나타내며 하늘의 보살핌으로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m이고, 양측 협계(挾階)의 폭은 각 1.3m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踏道)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四分心葉形) 윤곽을 양각(陽刻)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 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에도 당초(唐草)와 보상화(寶相華), 운문(雲紋)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계단 앞에는 어도와 좌우에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빈양문(賓陽門)은 창경궁의 외전인 명정전에서 왕과 왕비의 활동공간인 내전 문정전과 숭문당 등으로 연결되는 문이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왕실가족 외에 모든 남성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이는 창경궁의 땅 생긴 대로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유로이 전각을 배치하여 정문인 홍화문과 명정전은 동쪽을 향해 앉았다.

* 명정전의 초기에 쓰임은 인조가 반정 직후 정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정사를 위한 공간으로 거의 활용하지 않은 듯하다.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 대에는 노인들에게 경로잔치를 열었다는 가록도 있지만, 이보다는 왕실의 연회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들이 많았다. 성종은 세조의 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형 월산대군 등 서열이 높은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를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다.

* 명정전 행각에 주둔했던 장용영: 즉위 전부터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는 즉위 후 호위부대를 키우는데 각별히 노력을 기울었다. 1784년(정조 8)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현세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의 무과시험을 실시해 무려 2000명을 합격시켰다. 이듬해에 장용위라는 친위부대를 설치하여 이들을 모두 등용하였고,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였다. 1793년에는 서울과 수원에 나누어 주둔하였으며, 서울에 주둔한 군대는 명정전 행각에 자리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 보물 제385호)은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명정문(明政門)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보물 제249호) -

* 보물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창경궁 (와룡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