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 보물 제817호)은 인정전(仁政殿)의 서쪽으로, 월당·부속사를 경계로 근접하여 있다.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宗廟)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璿源殿)을 두었다고 한다. 원래 춘휘전(春輝殿)이란 건물로 조선 효종 7년(1656) 경덕궁(慶德宮)의 경화당(景華堂)을 옮겨지은 것으로,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왕(王)은 삭망(朔望)에 선원전에 나와서 친히 분향·배례(焚香·拜禮)를 하며 탄신일(誕辰日)에는 차례(茶禮)를 드렸다.
선원전(璿源殿)은 장대석 세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초석과 방주(方柱)를 세워 정면 7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이며, 앞면 좌우로 진설청(陳設廳)과 내찰당(內察堂)을 덧붙여서 제사 의례에 사용했다.
선원전 동편에는 양지당(養志堂)은 왕이 제사 전날 머무르던 어재실(御齋室)이다. 선원전 뒤편에는 의풍각(儀豊閣)은 제사용 그릇과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일제강점기에 신축한 것으로 전한다.
신 선원전(新 璿源殿)을 1921년 창덕궁 후원 깊숙한 서북쪽에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舊 璿源殿)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한다.
선원전(璿源殿)은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현재는 궁내에 소장된 주요 유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억석루(憶昔樓)는 선원전 남행각에 위치한다.『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억석루는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자편(?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이며,『한경지략』의 기록에 따르면 약을 최초로 발명한 신농씨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왕실의 제례- 유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육체와 혼백의 분리로 해석한다. 왕이나 왕비도 죽으면 육체는 시신이 되어 재궁(梓宮, 관)에 담기고, 하늘과 땅으로 흩어지는 혼백을 위해 신주(神主, 위패)가 만들어진다. 재궁은 빈전(殯殿)에 모셨다가 5개월 후에 산릉(山稜, 무덤)에 묻으며, 신주는 혼전(魂殿)에 모셨다가 삼년상을 지낸 후 종묘로 옮겨 모신다. 또한 죽은 왕을 모시기 위해 생전에 그려 둔 초상화인 어진을 선원전에 모신다. 산릉은 육신에 대해, 종묘는 혼백에 대해 각각 제사를 드리며, 선원전은 인격에 대해 제사를 드린다. 이 가운데 선원전은 왕가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곳이므로 궁궐 안에 만들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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