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사적 제122호)는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이다.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사적 제122호)는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이다.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內醫院)과 옥당(弘文館)이, 서편에 내각(奎章閣)과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小酉齋)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 내각(內閣)은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이문원(摛文院)이라고도 불렀으며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각(內閣)’이라는 현판은 규장각 남문에 붙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규장각을 복원하고서 붙인 것이다. 규장각(奎章閣)은 왕실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정조(正祖,1752~1800)가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王室世譜), 보감(寶鑑) 등을 보관·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북원(北苑), 곧 지금의 주합루(宙合樓)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규장각은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매월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 출신들을 등용했다. 이런 조치들은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1781년에는 규장각 청사를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또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훗날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주합루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고 소장 도서들도 이문원·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시강원(侍講院) 등에 분산되었다. 국권을 빼앗기면서 이 도서는 1911년 조선 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그 후 주무 관청이 몇 차례 바뀌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남았다. 그 도서를 소장·관리하고 연구하는 기관이 ‘서울대학교규장각’이다.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라는 뜻이다. ‘규(奎)’는 천체(天體)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 중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문장(文章)’을 상징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임금의 글이나 글씨를 미화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 책고(冊庫)는 봉모당 뒤쪽에 세 채가 있으며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책고(冊庫)’는 ‘책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뜻으로 ‘서고(書庫)’라는 말과 같다. 현재의 현판은 최근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새롭게 붙인 것이다. <동궐도>에 ‘책고(冊庫)’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건물의 기능 또는 용도를 기록한 것이지 현판이 곧 ‘책고’라고 쓰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 검서청(檢書廳)은 규장각의 검서(檢書)들이 입직(당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이 검서들은 입직을 해야 했다. 이들은 번갈아서 임금의 갑작스런 하문에 대비하고자 밤을 새웠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입직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이다. 현재의 검서청은 규장각의 서쪽에 있으며 순종 때 대유재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검서(檢書)’는 ‘서적을 점검한다’는 뜻이다.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가리킨다.
. 봉모당(奉謨堂)은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1776(정조 즉위)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 때 본래 이 곳에 있었던 역대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지었다. 봉모당은 다시 1857년(철종 8)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의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이는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 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했다. 1911년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지금의 봉모당은 소유재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1969년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봉모(奉謨)’는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모훈이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사를 논의하여 적은 글’ 또는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서경(書經)』의「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등의 편명에서 용례를 볼 수 있다. 운한문(雲漢門)은 내각 검서청에서 봉모당(奉謨堂)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봉모당 앞 마당에는 수령이 750살 정도의 천연기념물 제194호 창덕궁 향나무(昌德宮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다.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다. 일단 홍문관원이 되면 특별한 허물이 없는 한 출세가 기약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지제교(知製敎)가 될 만한 문장과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경연관(經筵官)이 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그 기구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했다가 1463년(세조 9)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 1506년(중종 1)에 복구했다. 1894년(고종 31)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건물은 일제에 의해 헐렸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옥당(玉堂)’은 ‘옥같이 귀한 집’이라는 뜻이다.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집, 또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집이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한편 옥당은 일반 명사로서 궁전의 미칭으로도 쓰이는데 한나라 때 궁전 이름으로 쓰인 적이 있다.『한서(漢書)』이심전(李尋傳)의 주석에 “옥당전은 미앙궁에 있다.”라고 하였다. ‘옥당’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로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였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한림원(翰林院)의 기능을 ‘홍문관’과 ‘예문관’의 둘로 나누어 홍문관을 옥당이라고 하고 예문관은 한림이라고 불렀다.
. 예문관(藝文館)은 인정전 서쪽 행각의 숭범문과 향실 사이에 위치한 관청이다. 예문관의 출입문은 숭범문 바깥쪽에 있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고, 사초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보관하는 관청이다. 영조가 14년과 32년에 친히 행차하여 각각 ‘태공사필(太公史筆)’, ‘창수고풍(?守古風)’이란 글씨를 써서 걸었다고 한다. 1811년(순조 11) 화재로 사료와 서적이 모두 불에 탔다. 현재의 건물은 2005년에 복원한 것이다. 영조 어필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이다. 예문은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에 관련된 도서를 총칭하기도 하고 사장(辭章), 문예(文藝)만을 한정하기도 한다.
. 약방(藥房)은 내의원(內醫院)으로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이다.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설치되었다가 1443년(세종 25)부터 내의원이라고 했다. 약방은 인정전 서쪽 행각에 가까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병을 가까이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의원을 내의사(內醫司), 궁 밖에 있는 의료 기관인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를 외의사(外醫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약방의 역할을 나타내는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의 현판이 현재는 옛 성정각(誠正閣)의 남쪽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고 약절구도 그 마당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純宗, 1874~1926)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내의원이 헐리고, 현판들과 의약 도구들이 옮겨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도구들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 때 성정각이 내의원의 기능을 맡게 된 듯하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약방(藥房)’은 ‘약을 짓는 방’이라는 뜻이다.
. 억석루(憶昔樓)는 선원전 남행각에 위치하며 누각 서편측은 내의원에 속한다.『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억석루는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자편(?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이며,『한경지략』의 기록에 따르면 약을 최초로 발명한 신농씨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5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