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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성종대왕 태실(胎室)과 태실비(胎室碑)

들풀/이영일 2016. 12. 12. 07:21

  성종대왕 태실(成宗大王 胎室)과 태실비(胎室碑)는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의 양화당(養和堂) 뒷편에 야산에 있다.

   성종대왕 태실비(成宗大王 胎室碑)는 미소를 머금은 이수의 거북이 얼굴이 흥미롭고 익살스러우며 친근한 느낌을 주는 거북이다. 앞발은 앞으로 내밀어 힘찬 느낌을 주는 비다. 태실비 전면에는 '成宗大王胎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成化 7년(1471)에 세우고 그 후에 세 번에 걸쳐 고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화 7년인 1471년은 성종 2년이다.

   성종대왕 태실(成宗大王 胎室)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鐘型) 몸체를 놓고 팔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에는 보주로 장식하였고 그 주위는 팔각으로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의 조각도 매우 정교하여 섬세하게 정성을 깃들여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실 안에 있던 태항아리 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을 하고 있다.

   태실(胎室)이란 아기가 태어날 때 자른 '태(胎)'를 보관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자른 태는 태호(胎壺)라고 하는 항아리에 넣는데, 먼저 작은 항아리인 외호에 태를 넣고 외호를 다시 큰 항아리인 내호에 넣은 다음 태실에 넣어 보관을 한다.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된다. 뱃속의 태아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안했다.

   성종대왕의 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원래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길 때 성종대왕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일제가 설립한 이왕가 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처럼 한 곳에 모으려는 생각은 일본이 우리 민족정기를 흐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창경궁 (와룡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