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대릉원 일원(慶州 大陵園 一圓, 사적 제512호)은 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등지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新羅時代 古墳群)이다.
경주 노동리 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 경주 노서리 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 경주 황남리 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 경주 황오리 고분군(慶州皇吾里古墳群), 경주 인왕리 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을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한 사적이다.
경주 노동리 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은 경주 중심부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봉황대 남쪽에 있는 식리총은 봉분 높이 6.5m, 지름 30m로 1924년에 조사한 결과 덧널(槨)을 설치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임이 밝혀졌다.
내부에서는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과 은제허리띠, 은팔찌, 고리자루큰칼(換頭大刀),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馬具), 옷칠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관이나 금동관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飾履)이 발견되었는데, 문양이 독특하고 매우 우수하여 이 무덤의 이름을 식리총이라 하였다. 봉황대의 남쪽에 있는 금령총 역시 1924년에 조사된 무덤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높이 4∼5m, 지름 약 18∼20m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금관, 금제귀고리, 금팔찌, 금제허리띠, 동제신발, 철제솥, 옷칠그릇, 유리그릇,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중 배모양 토기와 기마인물 토기가 특이하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으며, 금관과 장신구의 크기가 작고 순장의 흔적이 보여 신라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면적은 16,902㎡이다.
경주 노서리 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은 경주시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 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린다. 노서리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서봉총/호우총/은령총 제138호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槨)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石室)을 만들고 널길(羨道)을 둔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금관총은 1921년에 조사되었는데, 금관과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금공예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서봉총은 표주박 모양 쌍무덤의 북쪽 무덤으로,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었다. 또한 연대를 새긴 은으로 된 뚜껑이 있는 그릇(銀盒)이 출토되어 5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은령총과 쌍무덤을 이루는 호우총은 광복 후 최초의 유적발굴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51)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쓰여진 동합이 출토되었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쌍상총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마총에서는 말뼈와 안장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노서리 고분군은 노동리 고분군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돌무지 덧널무덤과 전기 돌방무덤이 밀집해 두 종류의 무덤 교체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경주지역의 무덤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면적은 44,200㎡이다.
경주 황남리 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은 경주시청 남쪽 건너편 일대의 신라초기 고분군이며 미추왕릉(味鄒王陵)을 비롯한 약 250기(基)의 고분이 있으며 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 1973년에는 천마총을 발굴하여 금관 및 천마를 채색으로 그린 백화수피장니(白樺樹皮障泥)가 나와 신라시대회화로서는 유일최고(唯一最古)의 것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지금은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게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또한 고분 중에 가장 큰 황남대총 98호는 1973∼75년 사이에 발굴 후 복원하였는데 통일신라 이전에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소형석곽분(小形石槨墳)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규모는 199,309㎡이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 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 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제 허리띠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황오리 고분군(慶州皇吾里古墳群)은 월성(月城) 북쪽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가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 외형상 봉토분으로 원형의 단독고분과 원형 고분 2기가 맞붙어 있는 쌍무덤이 있으며 대부분 삼국시대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인데, 황남동이나 노서동, 노동동에 있는 대형고분들보다는 대체로 규모가 작고 껴묻거리도 이보다 수준이 낮은 것들이 출토된다. 규모는 6만 6,545㎡이다.
경주 인왕리 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은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으로 일제강점기까지는 지상에 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경주고분군 가운데 황남동이나 노동동·노서동 일대에 분포된 대형고분들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았다. 지금은 모두 파괴되거나 도굴되어 없어지고 1기만 남아있다. 1977년에는 이 고분군의 지하에서 20여 기의 소형고분이 발견되어 조사되었다. 이 고분군에서 조사된 고분은 대부분 경주고분군에 일반적인 삼국시대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지만 지하에서 발견된 소형고분들 가운데에는 돌널무덤(石槨墓)과 독무덤(甕棺墓)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금동관·금귀걸이·은제허리띠 등의 꾸미개, 말갖춤, 은판으로 장식된 긴칼 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 고분군의 지하에서는 경주에 돌무지덧널무덤이 출현하기 이전의 덧널무덤(土壙木槨墓)도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대릉원(大陵園)이라는 이름은 “미추왕이 죽은 뒤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유래되었다. 래서 미추왕릉(味鄒王陵)이 있는 이곳을 다른 고분들과 함께 대릉원이다. 미추왕(味鄒王)은 신라 제13대 임금으로, 경주 김씨(慶州金氏)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며, 백성들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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