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서원 정문(正門)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있고 맞은 편 한 단 높은 곳에 옆으로 기다랗게 만대루(晩對褸)가 서 있다. 누 밑은 휘어진 자연 상태 그대로의 꾸불꾸불한 기둥이 받치고 있고, 2층 누마루에는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사방을 둘러쌌는데 벽은 두르지 않고 트여 있다. 정제된 공간은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유학의 꼿꼿하고 청청한 맥이 건물에 살아나 있는 듯하다. 이곳에 서면 한쪽으로는 병산과 낙동강이 펼쳐지는 주변 풍광을 다 끌어안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원 일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시「백제성루(百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인용한 것으로, '병산의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서야 대할 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병산서원 강당인 입교당에서 앞으로 내다보면 루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얽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강당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서 있다.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立敎]'는 뜻에 걸맞게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강당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7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들어가면, 잘생긴 배롱나무가 심어진 언덕 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북벽에 유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유진(柳袗, 1582∼1635)을 종향(從享)하고 있다. 사당은 강당과 함께 맞은편 병산을 향하고 있는데, 산봉우리를 마주 대하지 않고, 산 능선의 약 7부쯤 되는 곳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건물과 자연이 하나가 되게 하는 한국건축의 특성으로, 산봉우리를 마주보며 향하게 건물을 배치하는 중국건축과 차이를 이룬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신문에는 태극 문양을 그렸고, 길게 다듬은 기둥 초석에는 팔괘를 그려놓았다.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 서애는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존망(存亡)에 처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598년(선조 31) 이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河回)마을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책이다.
서애는 책 이름『징비록』을『시경(詩經)』에 나오는 "미리 지난 일을 징계[懲]해서 뒷날 근심이 있을 것을 삼간다[毖]"고 한 구절에서 빌어왔는데, 다시는 이 나라에 임진왜란과 같은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됨을 후세에 알리기 위함이었다.『징비록』은 서애의 고택인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忠孝堂)의 유물각인 영모각(永慕閣)에 전시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병산서원은 화산의 동쪽 기슭에, 하회마을은 그 반대쪽에 있다. '병산'은 강원도 산간 지방을 돌아 나온 낙동강 물줄기가 모처럼 넓게 트인 곳을 만나 센 물살을 만들며 항아리 모양으로 돌아 나가는 강변에 병풍[屛]처럼 산이 펼쳐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은 병산이 기암 벼랑 밑으로 흐르는 낙동강물에 깊게 그림자를 드리운 절경을 마주보며 자리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한국 미의 재발견-궁궐·유교건축/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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