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선생의 청백리 얼이 깃든 유적지는 경기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85번길 3에 위치하고 방촌영당(厖村影堂, 경기도 기념물 제29호), 방촌 황희선생상(厖村 黃喜先生像),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 앙지대(仰止臺), 월헌사(月軒祠), 방촌기념관(厖村紀念館)이 있고 유적지로부터 약 8km 떨어진 곳에 황희선생 묘(파주시 탄현면 정슬로 88번길 23-73, 경기도 기념물 제34호)가 있다.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 1452)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조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황희선생 영당지(黃喜先生 影堂址, 경기도 기념물 제29호)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의 대표격인 황희(1363∼145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영당이 있던 곳이다.
황희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으며, 세종(재위 1418∼1450)대에는 영의정이 되어 왕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삶을 통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문종 2년(145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 유림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셨다.
이 영당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한 것으로,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영정을 모셨으며, 전퇴(건물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서 달아 만든 칸)는 개방되어 있다. 건물 주위로는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방촌 황희선생상(厖村 黃喜先生像)은 방촌선생의 모습을 형상화 해 세운 동상으로 좌대에 황희선생의 두 편에 유묵(遺墨)이 음각되어 있다.「靑山臨黃河(청산임황하) 푸른 산은 황하까지 다달 앗는 데/下有長安道(하유장안도) 산 밑에 장안까지 가는 길이 잇 구나./世上名利人(세상명리인) 세상에서 명리만 쫓는 사람들은/相逢不知老(상봉부지노) 서로가 만나도 어른 됨을 모르리라 -,「觀風樓(관풍루) - 軒高能却暑(헌고능각서)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添豁易爲風(첨활이위풍) 처마가 넓으니 통하기 쉽네/老樹陰垂地(노수음수지)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遙岑翠掃空(요잠취소공)먼 산봉우리는 푸르네 하늘을 쓰는 것 같네」- 世宗 5년(1423) 監司 黃喜 -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다. 에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라고 이름지었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이다”라고 묘사해 놓았다. 임진강 기슭에 세운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이며,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앙지대(仰止臺)는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에 1915년 반구정을 옮기면서 원래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앙지대라는 정자를 세웠다.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형정자를 짓고 앙지대(仰止臺)라 이름 하였다. 앙지대 상량문에 ‘오직 선(善)만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는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호인(好仁)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다.
월헌사(月軒祠)는 황희 정승의 고손(高孫)인 월헌 황맹헌(月軒 黃孟獻, 1472~1535)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不祧廟)이며 황희선생의 증손인 부사(府使) 황관(黃瓘)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방촌 기념관(厖村紀念館)은 방촌이 재상으로서 일구어 온 황희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으로 유품과 서책, 글씨도 전시되어 있고, 나랏일에는 엄정하고 남들에게는 온유하며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황희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황희성생의 묘(黃喜 廟, 경기도 기념물 제34호)는 유적지로부터 약 8km 떨어진 파주시 탄현면 정슬로 88번길 23-73에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과 파주문화원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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