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 가족들은 10월 7일(토)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어린 시절에 교육한 왕의 스승이신 이수(李隨) 선생의 후손들이다. 이수(李隨) 선생은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始祖) 심은(深隱)으로 조선 태조 때 황해감사,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兵曹判書),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생은 종묘(宗廟) 공신당(功臣堂)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여주에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중에 영릉(驪州 英陵: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의 합장릉)과 영릉(寧陵: 조선 17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장씨의 동원상하쌍릉(同原上下雙陵)이 있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儒敎)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祖上)에 대한 존경(尊敬)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빈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가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祭禮)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세종대왕 영릉(英陵)의 구성: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동봉이실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정자각 동편으로 신계 좌우에 동계가 두 개 설치되어 있는 점은 다른 왕릉에는 없고 세종 영릉에만 있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영릉(英陵)의 역사: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 세종대왕동상, 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세종의 생애이야기: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세종의 일화: 세종은 재위한 이듬해에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신진 학자들을 양성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따라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보고오라 명하였다. 이에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아뢰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폈으나, 신숙주는 세종이 온 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 세종은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 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서야 전날 밤 왕이 행차하신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고 한다.
소현왕후의 생애이야기: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년(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 하여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승봉(陞封)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군국의 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이 모두 사사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는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소현왕후의 일화: 세종과 소헌왕후는 매우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료에 따르면 1436년(세종 18) 10월, 세종은 사정전으로 나아가 소헌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우리 조정 이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 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석가보』,『법화경』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이를 한글로 옮겨『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문헌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세종대왕과 15세기 과학 발전의 시대: - 간의, 관천대, 규표, 물시계. 소간의, 수표교, 앙부일구, 일구대. 일성정시의, 정남일구, 천평일구, 측우대와 측우기. 풍기대, 현주일구, 혼상, 혼천의 -
- 세종대왕의 세기: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15세기를 세종대왕의 세기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이 학문의 으뜸으로, 과학이나 기술학은 이에 비해 경시되었다. 또한 과학자들은 장인(匠人)이라 하여 명예를 누리지 못하였고, 경제적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과학기술이 국가의 근간을 다지는 중요한 발판이라고 여기고 선진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고유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15세기에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 세종의 과학 장려 정책: 세종은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여 집현전 학자들에게 일종의 연구를 위한 안식년인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를 두어 연구에 전념하게 하였다. 한편 기술혁신을 위한 지속적인 정책을 전개하여 과학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하였으며 기술개발을 위한 거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기술 습득을 위해 인재를 뽑아 중국에 유학시키고 이들을 두뇌 집단화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세종과 그의 아들 문종의 휘하에는 장영실, 정초, 정인지, 이천 등의 우수한 과학자들이 몰려들어 훌륭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 조선시대 왕립 천문대 간의대: 세종은 관료와 학자, 기술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간의대(簡儀臺) 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다. 1432년(세종 14)부터 7년여에 걸쳐 추진된 왕립 천문대를 건설하는 간의대사업에는 정초, 정흠지, 정인지, 이천, 장영실, 박연 등이 참여하였다.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약 10m 높이의 노대를 만들고 돌난간을 둘러 만든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등을 부설한 대간의를 설치하였다. 매일 밤 5명의 관리가 숙직하며 천체를 관측하였고, 24절기를 확정하여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종, 징, 북이 울려 시간을 알리는 자격루: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종과 징, 북이 저절로 울리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 자격루의 원리는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 빗물을 재는 그릇 측우기: 1441년(세종 23)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도구로, 이름 또한 ‘빗물을 재는 그릇’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육면체의 받침돌이 동그란 통을 받치고 있는 간단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통에는 주척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 통 안에 고인 빗물을 잴 수 있게 만들었다. 각 지방에서는 측우기를 이용하여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각과 비가 개인 시각을 기록하고, 비가 그친 후에 그릇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약 2mm 단위까지 측정하여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조선 초기인 당시에도 전국적인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었으며 이는 대다수 백성들의 생업이었던 농업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세종대왕과 한글이야기:
- 새로운 글자를 탄생시킨 발상의 전환: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1446년(세종 28)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글자인 한글이 반포되었다. 세종대왕이 일반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여 반포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 학문적으로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자 사건이었다.
- 한글의 과학성: 한글은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창제를 완성하여 3년 동안 다듬고 이를 실제로 써 보아 그 부족함이 없음을 확인한 연후 반포되었다. 초성(初聲) 17자는 사람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하여 나머지 글자를 만들었으며, 중성(中聲) 11자는 천, 지, 인(天, 地, 人)의 모양을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나머지 글자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음양의 대립으로 배합하여 만들었다. 이는 음운의 자질이 반영된 문자 체계로 보기 드문 독창성을 띠고 있다.
- 한글의 보급: 한글은 점차 백성들 사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삼강행실도』, 『소학』등의 교화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백성들에게 보급되었으며 선조 임금 대에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 한글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사대부 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늘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간찰 중에는 여성이 한글로 쓴 것들이 많으며, 여성을 독자로 하는 책들 또한 주로 한글로 간행되었다. 17, 18세기에는 한글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한글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 한글이 불러온 인쇄술의 발달: 한글은 인쇄술의 혁신마저 가져왔다.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글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학자와 기술자들로 하여금 활자를 주조하고 서적을 출판하게 하였다. 훈민정음의 반포 이후에 한글 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것이 『석보상절』이다. 그 이후 한글 활자를 이용한 다양한 서적들이 간행되며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 오늘날의 한글: 한글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들 중에서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다. 또한, 그 창제 정신이 '자주, 애민, 실용'에 있다는 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는다. 유네스코(UNESCO)에서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을 정도로 한글은 가장 배우기 쉬운 글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글자가 없는 소수민족들에게 한글이 보급되고 있고, 세계적으로 한글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IT기기 등에 입력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글자로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기술발전에 큰 경쟁력이 되고 있다.
영릉제향일(英陵祭香日)은 세종은 매년 양력 4월 8일이고 소현왕후는 양력 4월 28일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