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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성 초의선사(草衣禪師)와 한국차의 성지 일지암(一枝庵)

들풀/이영일 2017. 11. 29. 02:50

 대흥사 경내 초의선사(草衣禪師) 동상(銅像) -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성(性)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은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초의를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년)에 태어난 선사는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 일지암(一枝庵), 일지암 현판 -

  일지암(一枝庵) 해남 대흥사에서 1.6km를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조선조 후기 한국의 차문화를 정리한 초의선사가 39살이던 1824년(순조 24)에 중건하여 1866년(고종 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살았다. 일지암의 유래는 중국 당나라 때 시에 달관했던 한산(漢山)스님이 지은 많은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구(詩句)'가 있다.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에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 자신을 뱁새로 비교 한 듯 하다.

 초의선사(草衣禪師)는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 되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찾아 유배생활 하는 24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물론 초의승려는 다산 선생께 다선(茶禪)의 진미를 더하였을 것이다. 다산(茶山)은『각다고(榷茶考)』를 쓰고 초의(草衣)는『동다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토산차(土産茶)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렇게 두 분을 만나 중흥하게 된다.

- 일지암 내 자우홍련사(姿宇紅蓮社)와 현판 -

  자우홍련사(姿宇紅蓮社)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일지암의 본당(本堂)인 '자줏빛 토란과 붉은 연꽃'이란 뜻을 지닌 이 건물은 초의선사의 살림채로 연못에 평석(平石)으로 쌓아올린 네 개의 돌기둥이 누(樓)마루를 받쳐지은 누마루건물이다. 추사 김정희로부터 '자우산방(紫芋山房)'이란 당호를 얻었다고 한다. 네 개 돌기둥을 산쪽의 기둥은 10개, 나머지 3개의 돌기둥은 각 13개의 평석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초의사상(草衣思想)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塵穢,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精氣)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승려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單方藥)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交遊)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 동다송 시비(東茶頌 詩碑) -

  1866년 나이 81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맑은 차 한 잔의 맛과 멋을 초의는 이렇게 노래한다.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明月爲燭兼爲友/ 白雲鋪席因作屛 -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동다송』제16송 의역한 것이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차생활문화대전)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 최우성 신한국신문 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