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6호)은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毘盧殿)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이 이 부처님에게서 탄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가 이 부처의 응신(應身-부처의 몸: 부처의 삼신인 법신, 보신, 응신의 하나)이라 한다. 비로자나불은 삼세(三世: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전세, 현세, 내세)에 걸쳐 항상 설법하고 있으나 부처의 형상은 없고, 일체중생을 감싸 보호하시는 청정법신(淸靜法身)이라 하여, 우주 중심에 있는 불국토인 영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서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이처럼 형상이 없는 부처를 표현하기에는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 7세기 무렵 중국에서 형상도가 없는 불상이 만들어졌다. 시간은 흘러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비로자나불의 특징은 가부좌를 하고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이라는 수인을 취한 자세를 하고 있다.(단, 비로자나불의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오른손 아래, 왼손이 위)되어 있다.) 지권인(智拳印)이란 "비로자나불이 짓는 손 갖춤으로 이치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비로자나불상이 처음부터 가부좌에 지권인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은 입상(立像)으로 지권인, 시무외인/여원인 등의 수인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비로자나불이 가부좌에 지권인 수인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부터 시작해 널리 펴졌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은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右肩偏袒]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두 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지권인(智拳印)으로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극락전에 봉안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불국사사적기(佛國寺史蹟記)』 가운데 최치원(崔致遠)이 찬한「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의 내용처럼 진성여왕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의하여 조성한 불상으로 생각되어,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배근휘와 함께 떠나는 대한민국 국보를 찾아서/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