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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沈熏)의 상록수(常綠樹)에 산실, 당진 필경사(唐津 筆耕舍)

들풀/이영일 2018. 2. 2. 11:01

  당진 필경사(唐津 筆耕舍, 시도기념물 제107호)는 충남 당진군 송악읍 상록수길 97에 일제강점기 소설가이자 영화인인 심훈(沈熏)이 1934년 직접 설계하여 지은 문학 산실(産室)이었던 집으로, 대지 661㎡에 건평 62㎡(18.7평)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이다.

   심훈은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으로 내려왔으며, 독립하여 살고자 이 집을 직접 설계하여 필경사(筆耕舍)라 이름하였다. 필경사라는 옥호는 시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필경사 잡기(筆耕舍雜記)》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민족주의와 저항의식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1935년 농촌계몽소설로 유명한 대표작인 ‘상록수’를 썼다.

  심훈(沈熏, 1901-1936)은 본명 심대섭(沈大燮)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1915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했으나 3ㆍ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하고 1920년 중국의 항주 지강(之江)대학에 입학해 연극을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 조직 하였으며《동아일보》기자로 입사한 뒤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퇴사 하였다.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탈춤」을 ‘훈’이라는 필명으로《동아일보》에 연재하고「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 하였다. 1935년《동아일보》창간 15주년 특별 공모에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상록수」당선, 「찬미가에 싸인 원혼」,「기남(奇男)의 모험」,「황공(黃公)의 최후」등 단편소설이 있다.

  상록수(常綠樹)는 심훈의 대표작이다.《동아일보》1935년 8월 13일자에는 소설 공모의 취지와 선후평이 실려 있다. “첫째, 조선의 농ㆍ어ㆍ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태와 정조를 가미할 것, 둘째, 인물 중에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셋째, 신문소설이니 만치 사건을 흥미있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ㆍ어ㆍ산촌을 물론하고 열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농촌계몽운동은 1931년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운동을 시행함으로써 큰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1935년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과 규제 때문에 중단되고 만다.「상록수」의 여주인공은 원산여고 출신의 최용신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과 당시 농촌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상록수」는 1930년대 발표된 다른 작품들, 즉 이광수의「흙」(1932), 김유정의「봄봄」(1935), 이태준의「농군」(1939), 박화성의「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과 함께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상록수」내용: “수원고등농림학생 박동혁과 신학교 여학생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보사에서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동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 한곡리로 가 농촌계몽운동을 한다. 영신은 기독교 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청석골로 내려온다. 그녀는 부녀회를 조직하는 한편 마을 예배당을 빌려 어린이 강습소를 운영한다. 그녀는 기부금을 얻어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어느 날 주재소 소장은 영신에게 강습소가 좁고 낡았으니 학생을 80명으로 제한하고 기부금을 강요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청석골에 돌아온 영신은 학생들을 내보내나 아이들이 수업을 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감동하여 다시 받아준다. 영신은 하루바삐 새 교실을 만들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영신은 재력가의 집을 찾아가 기부금을 내줄 것을 간청하고 이로 인해 주재소 신세를 진다.

  출소한 영신은 과로로 쓰러져 입원하고, 기천은 농우회원들을 매수해 진흥회로 명칭을 바꾸고 회장 직을 맡는다. 화가 난 동혁의 동생이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자 동혁이 동생 대신 수감된다. 영신은 동혁을 면회하며 계몽운동에 전념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영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는 동안 병이 악화되어 청석골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영신을 장사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동혁은 상록수를 바라보며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필경사(筆耕舍)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다시 사서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기증하여 당진시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고려대학교출판부/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