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쌍봉사(和順 雙峰寺, 전라남도 기념물 제247호)는 통일신라시대인 839년 이전에 창건되어 혜철선사가 여름을 지냈고, 855년경에 철감선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종풍을 떨친 절로서, 지형이 절의 앞과 뒤에 산봉우리가 2개 즉, 쌍봉이되므로 이에 쌍봉사라 칭하였다.
현재 쌍봉사에는 대웅전, 지장전, 극락전과 새로 지은 요사채, 그리고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탑비가 있다. 먼저 해탈문 앞에 서면 기둥 사이 네모칸 안에 대웅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1칸, 측면 1칸에 3층 목탑형식을 한 독특한 집으로 1986년 말에 복원할 때 1962년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따라 새로 지었다. 지장전 안에 모셔진 보물 제1726호인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인왕상 등은 얼굴 표정이나 손가락, 옷주름 등 조각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또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인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유형문화재 제252호인 극락전 목조아미타불여래좌상, 문화재 자료 제66호인 극락전이 문화재로는 지정되어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국보 제57호)은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탑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碑, 보물 제170호)는 쌍봉사에 있는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이다.
철감선사(798∼868)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헌덕왕 7년(825)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문성왕 9년(847)에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기도 하였다. 71세의 나이로 쌍봉사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철감’이라 내리었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특히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흥미롭다.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和順 雙峰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一括, 보물 제1726호)은 조성발원문과「능주지사자산 쌍봉사제전기문집록(綾州地獅子山雙峰寺諸殿記文輯錄)」과「쌀봉사사적기(雙峰寺事蹟記)」등을 통해 이 상은 1667년경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파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의 경향은 조선후기 17세기 중·후반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던 조각승 운혜의 조각 경향을 잘 간직하고 있고,더불어 과거에 시문된 고색 찬연한 채색문양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곧 이 시왕상과 권속상들은 회화와 조각이 잘 어우러진 불상으로 조선후기 채색불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각승 운혜는 17세기 전반을 활약했던 수행-영철(守衍-靈哲)의 계보를 잇는 조각승으로 그의 조각 경향은 경림(敬林)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입체적이고 건장하면서도 중량감 넘치는 선 굵은 조각 경향을 선호하였는데,쌍봉사 지장시왕상에서도 이러한 조각 경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특히 이 지장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기를 통해 이 상은 1667년경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므로 아직 제작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해남 대흥사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 지장시왕상,해남 미황사 지장시왕상,순천 동화사 지장시왕상,순천 정혜사 지장시왕상 등 운혜파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조각상들의 조성연대 추정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고, 더불어 이 중에서 명계조각(冥界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화순 쌍봉사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17세기 중·후반경 활발한 조각활동을 펼친 조각승 운혜의 불상양식 연구와 운혜파 조각승의 조각활동과 경향을 시기별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내역은 지장보살좌상, 도명존자입상, 무독귀왕입상, 제1 진광대왕, 제2 초강대왕, 제3 송제대왕, 제4 오관대왕, 제5 염라대왕, 제6 변성대왕, 제7 태산대왕, 제8 평등대왕, 제9 도시대왕, 제10 오도전륜대왕, 귀왕상(좌), 귀왕상(우), 판관상(좌), 판관상(우), 사자상(좌), 동자상, 인왕상(좌), 인왕상(우)이다.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和順 雙峰寺 極樂殿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252호)은 쌍봉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여래상이다. 원래는 양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협시불과 함께 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아미타여래좌상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등이 약간 굽은 모습이다.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이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얕게 그려져 있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의 주름은 뚜렷하면서도 두툼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걸쳐 앉아 있다.
이 불상은 숙종 20년(1694)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과 조각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한국관광공사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