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살곶이 다리(서울 [箭串橋], 보물 제1738호)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교폭 20척(6m), 길이 258척(78m)으로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살곶이는 청계천(淸溪川)이 한강(漢江)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즉 사근동 남쪽에서 성수동으로 건너가는 곳을 말한다. 이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일 뿐 아니라 세종 대에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朴子靑)과 유연현(柳延顯)의 감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살곶이 다리[箭串橋]라고도 한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그래서『한경지략(漢京識略: 조선시대 한성부 역사를 서술한 책)』권2 교량조(橋梁條)에는 공식명칭이 제반교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용재총화(傭齋叢話: 조선 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잡기류(雜記類) 문헌)』에 의하면 “스님이 살곶이 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盤石)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御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반교가 언제부터 살곶이 다리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고장 지명이 살곶이평(箭串坪)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명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조선 태조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과의 갈등이 있어서 함경도 함흥에 머물고 있었다. 태종은 아버님을 한양으로 모셔 오고자 여러번 사람을 보냈으나 태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 박순이라는 신하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서, 따로 묶어 두었다. 밖에서 시끄럽게 말들이 울자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의 부친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 하고 한양으로 돌아올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런 정성에 감동한 태조는 우여곡절 끝에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왕을 맞을 준비를 하던 태종은 이 곳 살곶이벌에다 큰 차일(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을 쳤다. 특히 하륜의 말대로 굵고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앞에서 태조를 뵈었는데, 태조가 별안간 활을 쏘자 태종은 급히 기둥을 안고 피하여 화살이 기둥에 꽂혔다. 이 때 화살이 기둥에 꽂혔다 해서 살이 꽂힌 곳, 곧 '살곶이벌'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태조가 천명(天命)임을 말하면서 이곳을 ‘살곶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의 명칭에 대해서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살곶이다리'나 '전곶교'가 맞고 한자 이름 ‘箭串橋’는 ‘전관교’가 아니라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으나, 2011년 12월 23일 이를 해제하고 대한민국의 보물 제1738호로 지정하였다. 대다수의 석교 문화재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적 지정요건인 인물, 역사, 사건 등을 고려해볼 때 유형문화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므로 사적을 해제하고 보물로 변경 지정하였다.
이곳은 동으로는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송파(宋坡)에서 광주(廣州)·이천(利川)을 거쳐 충주(忠州)와 죽령(竹嶺)을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이르는 교통상 중요 선상에 놓여있다. 살곶이벌은 국왕의 군사대열장과 매사냥터로 이름이 났던 곳으로서 이 다리를 통해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의 능)과 헌인릉(獻仁陵, 태종과 순조의 능)으로 가는 왕의 배릉(拜陵: 고려ㆍ조선 시대에 임금이 선왕의 능에 참배하던 의례)길에 수시로 행차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官馬]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국왕이 군대의 열무장(閱武場: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곳)과 군사훈련 참관 등을 위해 뚝섬[纛島: 뚝섬은 본디 섬이 아닌 벌이며, ‘뚝’은 임금 행차 때 꽂아놓았던 깃발인 ‘둑’(纛)의 된소리]으로 행차할 때도 이용한 곳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바닥에 긴 돌을 깔아서 놓은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流水]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가 76m, 폭이 6m이며 돌난간은 없다. 좌우교대는 장대석 석축이고 중간에 교각석주 21열을 세우고 1열에 기둥 네 개를 배치하였다. 다리의 형태가 종횡(縱橫)으로 곡면을 이루어 조화롭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교각 위에 하천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고 멍에돌 위에 귀틀돌을 가로 걸쳐 놓은 구조로 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교각 4개 중 가운데 2개의 교각을 15 내지 40㎝ 가량 낮게 만들어 이 다리의 중량이 안으로 쏠리게 하여 다리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고종 때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다리의 반을 헐어 경복궁(景福宮)을 짓는데 사용하여 거의 100년 동안 다리가 폐쇄되기도 했다. 1913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가 덮여지고, 1920년에는 집중호우에 의해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가 방치된 것을 1971년에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27m 정도 콘크리트를 잇대어 증설·보수·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 참고문헌: 문화재청.『한국의 건축문화재 1 서울편』(홍대형, 기문당, 2011).『옛다리』(손영식, 대원사, 2003).『석조』(장기인, 보성각, 1997)/ 글: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