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화암사(完州 花巖寺)는 신라(新羅) 효소왕 3년(694년)에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설총(薛聰)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의 남쪽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문화유산 답사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운치있는 곳이다.
주요문화재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完州 花巖寺 極樂殿, 국보 제316호), 완주 화암사 우화루(完州 花巖寺 雨花樓, 보물 제662호), 광해군 때 호영이 주조한 것으로 절이나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을 때에는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급함을 알려주었다고하여 자명종이라고 부르는 화암사 동종(花巖寺 銅鐘, 지방유형문화재 제40호), 화암사 중창비(花巖寺 重創碑, 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가 있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完州 花巖寺 極樂殿, 국보 제316호)은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1425년(세종7) 성달생(成達生)의 시주로 건립됐으며,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했던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완주 화암사 우화루(完州 花巖寺 雨花樓, 보물 제662호)는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완주 화암사 우화루(完州 花巖寺 雨花樓)는 고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건물이다.
완주 화암사 괘불도(完州 花巖寺 掛佛圖,등록문화재 제625호)는 보기 드문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挾侍)로 권속들을 구성한 비로자나괘불도로서 주목된다.
채색(彩色)에 있어서도 근대기 불화에 수용된 서양화법(西洋畫法)을 적극 수용하여 입체감 있는 표현 뿐 아니라 수채화기법에 가까운 설채법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수용된 근대적 불화기법(佛畫技法)을 잘 보여주는 불화이다.
화암사 괘불도는 전통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를 함께 적용한 작품으로 불교 회화적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