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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의 문화유산들

들풀/이영일 2018. 3. 3. 11:55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는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쓴《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普願寺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보원사지(普願寺址)에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 普願寺址 石槽, 보물 제102호),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보물 제105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호),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 -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이 출토되었고, 부근 가야산 층암 절벽에 거대한 ‘백제의 미소(百濟의 微笑)’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이 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 왼쪽에 미륵보살반가사유좌상(彌勒菩薩半跏思惟坐像)이 조각되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 普願寺址 石槽, 보물 제102호)는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103호)는 절터 동쪽에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04호)은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塔)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전기(高麗前期)의 우수한 석탑이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보물 제105호)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호)는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의 탑비이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 서산 보원사지 출토 철불좌상(瑞山 普願寺址 出土 鐵佛坐像)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높이 1.5m,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보원사지(普願寺址)에서 출토(出土)되었다고 전한다.

  철불좌상(鐵佛坐像)은 둥그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낮고 팽팽한 원만형의 얼굴, 탄력 있는 가슴의 표현, 벌어진 어깨, 무릎 너비가 넓은 육중한 다리 등 존안은 젊고 밝은 표정이며 장대한 체구와 함께 9세기 말에서 10세기까지의 불상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불의(佛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착의법으로 간결한 옷주름을 형성하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군의(裙衣)로 덮힌 두 다리가 굵고 좌폭도 넓다. 양손은 절단되었지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손모양인 것 같다. 이런 특징들은 신라 중기(650∼775)의 석굴암본존불상(石窟庵本尊佛像)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체구가 당당하고 세부의 도식화가 심화되지 않아서 광주철불좌상(廣州鐵佛坐像)으로 이어지는 신라말과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의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고려 광종 즉위년인 949년에 석가삼존금상(釋迦三尊金像)을 조성하고, 또 광종 6년(955)에는 왕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삼존금상을 주조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불상들이 모두 보원사지에 봉안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이 철불좌상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