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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安東 河回-)의 유∙무형 뿌리 깊은 문화유산들

들풀/이영일 2018. 3. 4. 11:57

  안동 하회마을(安東 河回마을, 국가민속문화재 제122호)은 풍산 유씨(豊山 柳氏)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柳雲龍·柳成龍)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河回別神굿탈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安東 河回탈 및 屛山탈, 국보 제121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보물 문화재로 안동 하회 양진당(安東 河回 養眞堂, 제306호)과 안동 하회 충효당(安東 河回 忠孝堂, 제414호)이 있고, 국가민속문화재로는 안동 하회마을 화경당 고택(安東 河回마을 和敬堂 古宅, 제84호), 안동 하회마을 원지정사(安東 河回마을 遠志精舍, 제85호), 안동 하회마을 빈연정사(安東 河回마을 賓淵精舍, 제86호), 안동 하회마을 작천 고택(安東 河回마을 鵲泉 古宅, 제87호),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安東 河回마을 玉淵精舍, 제88호), 안동 하회마을 겸암정사(安東 河回마을 謙菴精舍, 제89호), 안동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安東 河回마을 念行堂 古宅, 제90호), 안동 하회마을 양오당 고택(安東 河回마을 養吾堂 古宅, 제91호), 등 많은 건축물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安東 河回탈 및 屛山탈, 국보 제121호)은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과 그 이웃인 병산마을(屛山-)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河回-)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병산탈은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현재 2개가 남아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탈이며, 격식과 세련됨을 갖춘 유물이다.

  원래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굿에 쓰이던 것이며, 마을마다 따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다. 이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로서 그 위에 옻칠을 두겹 세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었다. 턱은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말하는 것처럼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만들었다. 하회 가면 중에서도 특히 양반과 백정은 입체감과 조각기술면에서 우수함이 돋보인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다만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허씨가 살았고, 안씨 집안이 들어온 후, 유씨가 조선 전기에 살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대체로 고려 후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하회별신굿탈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당제·무동·신방놀이·주지마당·파계승마당·혼례놀이 -

- 하회별신굿탈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백정마당 -

- 하회별신굿탈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양반선비마당 -

∘ 하회별신굿탈놀이(河回別神굿탈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면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별신굿이란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과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안동 하회마을 화경당 고택(安東 河回마을 和敬堂 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은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그 중 북촌택은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함께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규모가 큰 집으로 북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경상도 도사를 지낸 유도성이 철종 13년(1862)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 앞에 보이는 건물이 'ㅁ'자형 몸채이며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별당채이다.

  사당은 별당채를 지나 안쪽에 별도로 담장을 둘러 지어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몸채는 완벽한 'ㅁ'자 평면을 가지고 있다. 앞쪽이 사랑채로 오른쪽에 큰 사랑, 왼쪽에 작은 사랑을 두었으며 각 끝칸에 대청을 만들었다. 큰 사랑에는 ‘화경당(和敬堂)’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하며, 뒤쪽 방은 서재이다. 작은 사랑 대청 뒤편으로 1칸 방이 부엌 아랫방과 연이어 있다.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세웠으며 기둥도 매우 높이 올렸다.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과 안방, 오른쪽에 아들과 며느리의 방으로 쓰는 건너방(윗상방)이 있다. 안방은 '田'자 구조로 함경도 지방의 형식을 띠고 있고 부엌은 3칸이 넘는 크기로 2칸의 아랫방과 연이어 있다. 건너방 앞에 툇마루와 연결된 방(아랫상방)은 살림을 물린 노부모가 사용하는 방이다. 별당채는 앞면 7칸·옆면 2칸 크기로 부엌, 온돌방, 대청, 마루방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 액자가 걸려 있고 건축 구조상 많은 장식으로 꾸며 지은 집이다. 별도로 마련된 사랑채는 3문을 두고 평범하게 지어 놓았다.

  하회마을 북촌의 큰 집 중 하나이며 양반집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본보기로서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안동 하회 충효당(安東 河回 忠孝堂, 보물 제414호)은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류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