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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임진왜란 상황을 기록,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

들풀/이영일 2018. 3. 5. 18:36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柳成龍)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모셔졌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징비록(懲毖錄)』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